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강 Dec 19. 2023

학기말의 말(末)

X가 제법 쌓여있어 매우 뿌듯

  학기말의 말(末)이 정말 다가오고 있다. 출석일로만 세어보면 열 손가락 안에 들어온다!(!!!!!!) 월초에 공람된 이달의 학교 일정표 날짜 위에는 퇴근 직전 네임펜으로 반듯하게 표시해 온 X가 제법 쌓여있어 매우 뿌듯하다.


  학기말 성적 처리를 제외하고, 이제 남은 일은 이 정도인 것 같다.

1. 학교생활인권규정 개정 완료 및 교육청 보고
2. 약 1.9천만 사업비 정산 보고서 작성
3. 2024학년도 업무(부서) 예산 요구서 작성
4. 졸업식 및 겨울방학 대비 안전교육 계획서 작성

적어놓고 보니 꽤 굵직한 일들이다. 2주 안에 모두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바빠지지만, 다음 2주 동안의 나를 믿어보겠다.(…)


  교육부, 도교육청, 교육지원청에서는 현장의 업무 경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왜 예산 요구서의 내용이 더 많아지는 걸까. ‘우리 학생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라는 명목과 ‘교육’이라는 범주만 붙여 보내는 많은 공문과 예산이 현장에 정말 도움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교사는 그 모든 업무를 기꺼이 수행해야 할까. 공무원이라는 신분과 책무에 대해 따져 묻고 싶은 것이 아니고, 현장에서 업무 담당자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와 거리감이 큰 시책들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 오히려 늘어나고 -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현장의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계획을 수립하고 운영하라는, 넉넉한 선심이 듬뿍 묻어나는 공문과 예산들. 현장에서 바로 선택하여 적용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예시안이라도 같이 보내지도 않으면서 ‘널리 이롭게’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쓰라는 ‘책임회피형’ 업무 시달은 현장의 업무 담당자들, 교직원들을 피로하게 하고 정작 본연의 임무에 대한 동기와 성취를 크게 떨어뜨린다. 그러면서 계획은 제대로 세웠는지, 예산은 알맞게 썼는지 정해진 날짜까지 정확하게 보고하란다. 세금이 예산의 원천이니 목적에 맞게 투명하게 집행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따른 당연한 절차라고 여길 수 있겠지만, 시의적절한 도움 없이 현장의 고민과 노력을 감독하고 취합만 하는 상급 기관은 얄밉다. 그런 상급 기관은 AI로도 대체 가능한 시대가 되지 않았나.

  현재 생활부장으로서 제일 많이 고민해야 하는 일은 4번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작 내 뇌는 1, 2, 3번 일들을 계속 의식하게 된다.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할 일에 대한 반응이 주객전도 되는 상황은 당연히 바람직하지 않다. 교사에게는 학생 교육이 먼저지, 그깟 보고서 작성이 뭐 그리 대수냐고 말할 수도 있겠고, 저 부담스러운 일들 또한 교육활동에 포함되는 것이니 그만 불평하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건, 교사의 머릿속이 복잡해질수록 학생에게 줄 수 있는 따스한 눈길과 말 한마디를 무의식적으로 줄이게 된다는 것. 이 직업에서 제일 중요한 ‘관계’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학년도 마무리 작업이 가볍지는 않아도 개운한 마음으로 끝을 만나기 위해, 조금만 더 힘내서 해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여전히 모르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