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케어러 자조모임 <오아시스 크루> 의 시간을 돌아보다
이 글은 작년에 월드비전과 함께 전국 7개 지역에서 55명의 영케어러와 함께 ‘오아시스크루’라는 이름의 자조 모임을 4회에 걸쳐 진행한 진저티프로젝트 박선자 팀장의 프로젝트 회고 글입니다.
*영케어러 : 정부는 2022년 돌봄 청년 실태조사를 하고, 수립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질병이나 장애 등 다양한 이유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가족이나 가구의 구성원을 돌보고 있는 청년을 의미합니다. 현재 ‘가족돌봄청년’으로 불리고 있지만 최근 가족돌봄청년이라는 용어는 당사자의 경험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당사자 친화적인 용어를 사용하길 바라는 그들의 의견을 반영해 ‘영케어러’라고 지칭합니다.
전국의 영케어러를 만나기로 결정 했을 때, 왠지 자신 있었다. 탈북청(소)년도 꽤 오래 만났고, 자립준비청년 관련 연구도 했으니 영케어러와의 만남은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호기롭게 1회차의 첫발을 내디뎠고 한 달 동안 전국의 7개 지역을 돌며 청년들을 만났다.
하지만 1회차를 마치고 난 후,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소진이 찾아왔다. 마치 급성 번아웃이 온 것처럼 (급성 번아웃이라는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온몸에 힘이 빠지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이 시간이 진짜 필요한 걸까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데, (영케어러) 자조 모임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걸 어떻게 설득하고, 청년들도 필요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졌다. 지역 간의 격차, 청년들의 상태, 이들이 처한 현실과 상황 이 모든 게 내내 나를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1차 연도의 목표여야 한다고는 하지만, 현황을 파악하는 게 괴로운 일이구나 싶었다. 낙담이 되기도 하고⋯. 아⋯ 우리나라의 이 불균형은 어쩌지⋯. 왜 이걸 보게 된 걸까⋯”
<24.10.07 주간 회의 일지>
첫 모임에서 청년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적어도 나는 그때 그렇게 느꼈다. 낯설어하는 그들의 표정에 압도당해서 여유를 가지고 그들을 살피지 못했다. 그들의 그런 수동적인 모습에 청년들을 잘 안다고 자신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큰일 났다”라는 말이 입에서 떠나질 않았다. 당시에는 그들의 소극적인 반응을 해석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전국을 돌며 1회차를 마친 후 사무실로 출근해서 주은님(대표님)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그들의 상황에 대한 울음인지, 내 처지에 대한 울음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처지에 대한 한탄이었던 것 같다. 마치 트로트 가수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며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데 무능한 나를 계속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들을 위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나는 너무 무능하다.’
지금 돌아보면, 청년들에게 이 모든 상황은 낯설었을 것이다. ‘수혜자’의 입장에서 자조 모임에 참석했으니 그저 시간만 잘 보내고 가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생경해할 마음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그들의 낯설어 하는 반응에 압도당하고 있었던 것 같다.
청년들이 처한 다양한 맥락과 상황, 성별과 나이에 따른 다양한 반응들이 하나의 패턴으로 읽히지 않아 어떤 프로그램을 해야 모두에게 좋을지 가늠이 안 됐다. 이전에 만났던 자립준비청년들이나 탈북 청년들과의 공통점도 찾고 싶었으나 그것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초반에는 내내 패턴을 찾는 데 급급했다. 패턴을 빨리 찾아서 빠른 솔루션을 제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패턴은 커녕 공통점도 없어 보였다.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를 추적해서 알려진 것이 나오면 고통이 줄어들고, 마음이 진정되며, 힘을 얻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위험, 소란, 불안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볼 때 생기며, 최초의 반응은 이런 고민스러운 상황을 제거하는 것이다. 제1원칙은 다음과 같다. 어떤 설명이든, 설명이 없는 것보다 낫다. (…) 원인을 만들어내려는 욕구는 공포의 느낌에 의해 생겨나고 조절된다.”
<"우발과 패턴"중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
니체의 말처럼, 처음 마주한 그들의 무관심한 반응에 짓눌린 나는 이 상황을 빨리 ‘정상화’하고, 신속한 해결책을 제시해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사회에 건강한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공통적으로 이런 딜레마를 겪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선한 의도가 오히려 조급함을 불러일으켜, 상황을 차근차근 파악하기보다 빠른 솔루션을 찾는 데 급급하게 만들고, 결국 스스로 걸림돌을 만드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소진 덕분에 ‘잘해야지’ 다짐하며 힘을 주었던 몸에서 저절로 힘이 빠졌다. 매일 밤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청년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이 이모(?)의 간절한 마음이 통하기를⋯.
무엇이든 시간이 필요하다. 그들과 아직 라포도 형성되지 않았는데 무작정 ‘자조 모임은 좋은 거야’라고, 설득할 수 없는 거다. 그때 처음의 기획 단계를 돌아보게 되었다. 어떤 경험을 하게 하면 좋을지 끝도 없이 고민했던 처음으로 돌아갔다. “맞아, 우리는 혼자만의 시간이 부족할 청년들에게 쉼의 시간을 주고 싶었지.” 첫 마음이 생각나기 시작하니 내게도 조금씩 힘이 생기는 듯했다.
그 마음을 가지고 2회차를 시작했다. 지역별로 편차가 있었지만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대전에서 두 번째 모임을 할 때였다. 두 시간의 모임이지만 정말 알차게 준비했다. 서로의 근황 토크부터 보드게임 두 개, 그림 그리기, 서로 격려의 메시지 주고받기 등⋯.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요즘 근황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와 그림에 격려의 메시지를 달아주기로 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시간을 확인해 보니, 끝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모두에게 적어주는 것은 어려워보였다. 그래서 두, 세 사람에게만 적어줘도 된다고 말했다. 그 순간 참여자들의 눈빛이 비장하게 바뀌고 글씨가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청년들은 빠른 속도로 포스트잇에 댓글을 적기 시작했다. 한 명도 빠뜨리지 않겠다는 듯이!! 그리고 모두의 그림에 모두의 댓글이 달렸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청년에겐 “철수(반려묘 이름)의 장수 기원합니다.” 중간고사 기간인 대학생 청년에겐 “바쁜 일상이지만 건강 챙기세요!”,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한 청년에겐 “몸도 마음도 멋진 사람 화이팅입니다!.” 등 진심을 다한 그들의 응원과 격려가 운영진을 포함한 모두의 그림에 가득 달렸다. 자신에게 쏟아진 응원과 격려에 저절로 미소를 지으며 꼼꼼하게 댓글을 읽는 장면들이 아직 눈에 선하다.
서로를 깊이 알지 못해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상대에게 격려를 해주고 싶은 따뜻한 마음의 장면을 통해 “아 청년들에게 이런 경험이 필요했구나.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이 필요했구나. 격려받고 싶은 마음이 필요했구나…” 라는 어떤 힌트를 얻게 되는 시간이었다.
영케어러들과 함께한 4회차 모임을 모두 마치고 돌아보니, 아찔하면서도 뜨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아쉬움이 가득 남았다. "여러분을 알고 싶어요. 여러분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라는 우리의 발신에, "내 목소리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해요."라는 그들의 응답을 작게나마 수집하는 것으로 첫해를 마무리했다.
전국의 지역을 직접 찾아가는 일은 체력적으로 쉽지 않았지만, 많은 지원이 충분히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청년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을 돌보는 청년들이 나이에 따라, 사는 지역에 따라, 돌봄의 기간에 따라, 청년 자신의 건강 상태에 따라, 주 돌봄자인지 부 돌봄자인지에 따라 양상이 다르다는 것도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제 고민을 친구나 부모님한테 잘 말 안하는 성격인데 여기 와서는 속시원하게 말한 것 같아서 항상 끝날 때마다 마음이 편했어요.” - 오아시스크루 (고구마)
친한 친구에게조차 가족을 돌본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청년이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기차를 타본다며 좋아했던 청년을 다른 지역으로 초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칭찬과 격려의 말을 간절히 원했던 청년에게 "너무 잘하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말해줄 수 있어서 기뻤다. 또한, 무해한 모임이 필요했던 청년에게 안전한 커뮤니티를 만들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가족을 돌보면서도 한 번도 그 일을 남의 일이라 여겨본 적 없는 청년에게 "그래도 누군가 너를 도와줄 수 있고, 함께 감당해도 된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서 뿌듯한 시간이었다.
청년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삶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는 건 어쩌면 ‘데스티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역마다, 그리고 각 청년의 상황마다 영케어러의 모습이 다르기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만난 영케어러들과의 경험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올해, 만약 우리에게, 그리고 나에게 그들을 만날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조금 더 가열차게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함께 갑시다."라고 발신하고 싶다. 설령 응답이 더디더라도, 그들에게 나의 마음의 힘을 나눠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