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강 Feb 27. 2018

오래 전 신들의 시절에 - 바다

존 밴빌/ 문학동네

시더스, 피난처


그 곳은 여름 별장이었다. 오래 전 내가 소년이었을 때, 우리 가족은 시더스라는 이름의 여름 별장이 있는 바닷가에서 머물곤 했다. ‘그 일’ 이후 나는 그 바닷가를 다시 찾지 않았다. 50년 가까이.   

  

내가 다시 그곳을 찾은 건 꿈 때문이었다. 꿈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꿈에서 나는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축축한 눈이 내리고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나는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중요한 여행 중이었다. 도로에는 나 혼자였다. 꿈에서 나는 도로를 혼자 걷고 있는 나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가엾은 나는 어디에도 이르지 못한 채 끝도 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꿈에서 깨자 갑자기 아주 오랜만에 그 시절이 떠올랐다. 여름 별장인 시더스와 해변과 시더스에 머물던 그레이스 가족과 내가 사랑한 클로이가 있던 그 시절이.   

  

“과거 속에서 사시네요.”

클레어가 말했다. 클레어는 내 딸이다. 아이 말이 옳았다. 나는 과거 속에서 살았다.

이전에는 내가 단검을 입에 물고 모든 사람과 맞서는 해적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망상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한 건, 숨는 것이었다. 나는 아늑한 피난처를 찾아 위안 받는 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썼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고 싶었다. 시더스가 있는 해변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나는 과거를 찾아 숨어들 듯 거기에 가기로 했다.

소년이었을 때, 우리 가족은 시더스가 있는 해변에서 몇 달씩 머물렀다. 나는 거기서 그레이스 가족을 만났다. 그레이스 씨와 그레이스 부인과 쌍둥이인 마일스와 클로이를. 나는 그들을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과 어울려 지냈던 몇 달은 빛나는 신들의 시절이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는 시더스에 있는 방 하나를 얻었다. 내가 늘 향하고 있던 곳, 머물러야 할 곳에 비로소 도착한 기분이었다. 이곳이야말로 당분간 나에게 유일한 피난처였다.        



계급, 결핍, 매개체


우리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는 여름이면 이곳에서 휴가를 보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기 전까지.

아버지는 저녁마다 말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일터에서 돌아왔다. 어머니는 탁자에 앉아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불만을 키워갔다. 아버지는 난폭한 농담을 하고 몸짓이 난폭했지만 소심했다. 나는 밤마다 비좁은 철제 침대에 누워 그레이스 가족을 생각했다. 단조로운 파도소리와 바닷새 소리에 섞여 앞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매일 밤 싸웠다. 갈아서 내는 것 같은 작은 소리로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어느 날 밤 아버지는 우리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떠난 뒤 어머니는 흔들리거나 깜박거리지 않는 가혹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번에는 네가 날 배반하겠지, 하고 말하는 눈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그레이스 가족의 양자로 가버려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나는 아버지처럼 나 역시 언젠가 어머니를 배반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우리 가족은 사회적 계단의 밑바닥에 위치한 계급이었다. 여름별장인 시더스에 머물고 있던 그레이스 가족은 신과 같은 계급이었다. 나는 그들을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 가족과 어울릴 수 있었던 나는 선택된 자였다. 신들이 나를 골라 은총을 베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떠난 후 십대 시절 내내 어머니와 나는 셋방을 전전하며 이 하숙집에서 저 하숙집으로 옮겨 다녔다. 어머니는 아무 기술이 없었고 학교도 얼마 다니지 않았지만, 어딘가 자신에게 이상적인 일자리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우리는 어머니가 찾아 헤매는 이상적인 일자리를 찾아 자주 옮겨 다녔다. 그 방들은 내 기억에 모두 똑같았다. 어머니는 한밤중 잠에서 깨어 주먹으로 입을 누른 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나는 딜레탕트로 태어났다. 나는 미술 책 쓰는 일을 했다. 애나를 만나기 전까지 내게 부족한 건 돈 뿐이었다. 애나는 자산이 많았고, 내 부족함을 메워주었다. 애나와 결혼하기 전 둘이 함께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냉소적이었다.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떠나자 열린 문 뒤에서 팔뚝을 들어 눈을 가리며 울었다. 나는 어머니를 결혼식에 초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해 겨울, 운하 옆 벤치에 앉은 채로 죽었다. 협심증이었다. 부랑자 한 명이 갈색 봉투에 든 병을 한 모금 하라고 권하다가 어머니가 죽은 것을 알았다.   

  

그래, 나는 내 출신을 부끄러워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훌륭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얻고 싶었다. 올림포스 산을 기어 올라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월한 사회적 지위, 높은 계급으로 오를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했다.

고백하겠다. 그레이스 가족의 쌍둥이 여자아이 클로이는 첫 번째 매개체였다. 내가 클로이에게 원했던 건, 그 애 가족의 우월한 사회적 지위와 같은 수준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만나 아내가 된 애나에게 원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애나를 통해 환상을 실현하려 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고, 애나는 내 변형의 매개체였다. 애나를 본 순간 즉시 알았다. 그녀가 내 환상을 채워줄 대상임을.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걸 깨달았다. 애나가 죽고, 피난처 같은 어린 시절의 해변으로 돌아와 치열한 자기 직시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애나


애나는 물었다.

“왜 당신 자신이 되려 하지 않아?”  

뭐든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였다. 애나는 나를 알았다. 애나가 아니라면 누가 나를 알 수 있을까? 우리는 함께 행복했다. 아니, 불행하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룰 수 있는 것 이상이다.

    

애나는 사진을 찍었다. 나는 애나가 나를 찍는 걸 싫어했다. 애나가 찍은 사진 속 나는, 충격적일 정도로 나를 드러냈다. 환심을 사려는,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웃음을 지으며 추파를 던지는 표정. 늙은 사기꾼의 얼굴 사진. 애나가 찍은 사진 속에서 나는 까발려졌다.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다.   

  

나는 애나를 숨 막히게 더운 오후 누군가의 아파트에서 열린 파티에서 처음 발견했다. 내가 애나에게 처음 끌리게 된 건 그녀의 냄새 때문이었다. 삶 자체를 졸인 듯한 야성적인 냄새. 아무리 강한 향수로도 완전히 가려지지 않는 냄새. 얼마 후 애나는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병 때문에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애나는 잠을 못 이뤘다. 그녀의 내부에서 공포가 발전기처럼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가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놀라 어둠 속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온당치 못하다고, 애나는 말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화가 피에르 보나르는 전차에서 내리는 소녀를 보고 그녀의 일터까지 따라갔다. 소녀의 이름은 마르트였다. 마르트는 은밀하고 질투심이 많고 소유욕이 강하고 피해망상증에 심기증 환자였다. 보나르는 마르트를 위해 은둔생활을 하며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다. 마르트는 욕조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보나르는 욕조에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반복해 그렸다. 보나르는 칠십대의 마르트를 그린 마지막 욕실 그림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생각했던 나이인 십대로 묘사했다. 그게 마르트를 향한 보나르의 사랑이었다.

애나도 몸이 아프자 오랫동안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목욕이 마음을 달래준다고 그녀는 말했다. 가끔 목욕을 하고 있는 그녀가 너무 조용해서 걱정되곤 했다. 나는 문 너머에서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럴 때면 그녀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버렸기를, 모든 것을 정리해버렸기를, 그녀와 나를 위해서 그래주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치밀곤 했다. 그게 보나르와 내 사랑의 차이였다.

애나는 너무 아팠다. 무덥고 끈적한 여름이었다. 그녀가 보게 될 마지막 여름이었다. 애나는 내게 말했다. 말도 조심해야 하고 늘 잘해줘야 하다니, 가엾다고. 하도 말라서 뼈까지 닳아 들어간 그녀의 얼굴에는 섬뜩한 아름다움이 서려 있었다. 애나는 말했다. 나도 당신을 조금은 미워했다고. 우리도 어차피 인간이었으니까. 그래, 내게는 뭔가가 빠져 있었다. 보나르는 마르트가 죽기 1년 전부터 그린 그림을 6년 만에 완성했다. 그림 속에서 마르트는 나이를 잃은 채 세계의 여신으로 욕조에 누워 있다.

    

죽기 전, 애나는 짐승의 발톱 같은 느낌으로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 원숭이 같은 손아귀가 지금도 내 손목을 쥐고 있다. 애나가 죽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침이 오기 전의 검은 공기를 들이마시러 요양소 계단에 나가 있었다. 애나는 동트기 전에 죽었다. 간호사가 나를 부르러 왔다. 간호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나는 마치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애나가 죽고 나는 그곳으로 갔다. 내 유일한 피난처, 신들의 시절을 보냈던 해변, 그레이스 가족과 클레어와 어울려 보냈던 시더스 별장이 있는 바닷가로.     


    

신들, 그레이스 가족, 클레어


조수가 이상한 날이었다. 바닷물이 계속 부풀어 올라 들어본 적 없는 높이에 이르렀던 날, 신들은 떠났다. 나는 다시는 수영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날 이후로. 안 해, 두 번 다시는. 그렇게 다짐했다.  

   

오래 전 신들의 시절에, 내가 열 살이나 열 한 살이었을 때, 그레이스 가족이 여름휴가를 보내러 시더스 별장으로 왔다. 그레이스 씨와 그레이스 부인과 클로이와 마일스가. 클로이와 마일스는 쌍둥이 남매였다. 그레이스 가족을 처음 본 곳은 해변이었다. 그들은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공을 잡으려 펄쩍 뛰고 비명을 지르고 웃음을 터트리는 그레이스 부인을 보고 나는 사랑에 빠졌다. 그레이스 부인의 흔적을 가까이서 접하기 위해 나는 클로이와 마일스를 사귀기 시작했다. 부인에 대한 강렬한 감정이 극치에 이르자 바로 피식 꺼지고 말았지만.

클로이와 마일스는 서로 연결되어 묶여 있었다. 감정을 함께 느끼고, 생각을 공유하고, 같은 꿈을 꾸었다. 클로이는 말했다. 마일스와 자신은 두 개의 자석 같다고. 방향이 바뀔 때도 있어서 서로 끌기도 하고 밀기도 한다고. 그레이스 가족과 어울려 지내는 동안 나는 신들 사이에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이전에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우리는, 클로이와 마일스와 나는 거의 매일 바다에 나갔다. 햇볕을 받거나 비를 맞으며 수영을 했다. 어느 날 나를 보는 클로이의 눈에 변화가 생겼다. 우리 둘은 작은 동물 같았다. 코를 킁킁거리며 서로의 냄새를 맡았다. 클로이의 입에서는 사과냄새가 났다. 그 애는 새끼사슴 같은 냄새를 풍겼다. 극장에서 그 애와 서로를 향해 입이 만날 때까지 얼굴을 담갔을 때, 소음은 멀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클로이와 사랑에 빠졌다.

클로이를 사랑하게 된 후 나는 세계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클로이는 내 자기의식의 진정한 기원이었다.     


그 날, 조수가 이상했던 날, 파도도 없이 쉬지 않고 밀려오는 조수에 갈매기들이 급강하하며 비명을 지르고 하늘은 안개로 온통 흰빛이던 날, ‘그 일’이 일어났다. 클로이와 마일스는 세상에 등을 돌린 채 서로를 감싸 안고 조수가 부풀어 오른 바닷가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냥 서 있었다. 정신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지금도 나는 가끔 길에서 클로이를 본다. 그 애일 수도 있는 누군가를 본다. 그 애는 한순간은 나와 함께 있다가 그 다음 순간에는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 어느 순간에도 클로이는 늘 견고하고 고집스러운 그녀 자신으로 남아있다.

애나는 말했다. “왜 당신 자신이 되려 하지 않아?”

내가 달리 살 수 있었을까. 나는, 늙은 원숭이인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작가, 존 밴빌>


존 밴빌은 아일랜드에서 자동차 정비소 직원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미술에 관심을 가져 화가나 건축가가 되려 했다. 가족과 멀어지기 위해 항공사에 취직해 여러 나라를 여행했고, 편집자로 일하며 30년 가까운 직장생활을 했다.

신문사 편집자로 일하면서도 2,3년에 한 권꼴로 장편소설을 써냈다. 직장을 그만 둔 뒤에는 필명으로 범죄소설도 쓰고 있다. 밴빌은 시와 소설을 섞은 새로운 형식의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밴빌은 열 네 번째 장편소설인 ‘바다’로 맨부커 상을 받았다. ‘바다’는 미묘하며 복잡한 소설이다. 삶 자체가 복잡 미묘하므로 소설 역시 복잡하고 미묘해진다고 밴빌은 보았다. 이 소설에는 밴빌이 노동계급인 자신의 출신을 반영한 듯 하층계급인 주인공이 느끼는 자의식이 무겁게 깔려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언어 마법사’라고 불리는 밴빌은 노동계급 출신의 모더니스트이자 스타일리스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 - 다섯째 아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