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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너지니 Oct 17. 2024

스물도 서른도 아닌 애매한 나이 아홉수의 기록

안주하기엔 아직 젊고, 경로를 바꾸기엔 내려놓을게 생긴


어릴 때부터 내게는
‘나이’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특히 지나치지 못하는 제목들이 있다. 10대에 꼭 읽어야 하는 책, 20대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 70세 노인이 젊은이에게 전하는 조언… 이걸 모르면 제대로 나이 들지 못하리란 암시를 주는 제목을 어찌 스쳐 지나가겠는가. 삶의 힌트를 찾길 바랐지만 기억나는 문장이 없는 걸 보면 번번이 낚여버린 걸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하나의 집착은 늘 도달하고 싶은 나이가 있었다는 거다. 수험 생활을 할 때의 목표점은 스무 살이었다. ‘반짝반짝 스무 살’이라 나름의 슬로건까지 만들어두고 손꼽아 기다렸다. 친구들이 다 하는 재수도 포기할 만큼 내게는 중요한 이슈였다. 실제로 경험한 스무 살의 현실은 생각보다 엉성하고 시시했지만 특정한 나이를 기다리는 나의 습관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어느 순간부터는 주변에서 답을 찾았다. 눈을 돌려보니 복학생 오빠들과 맞담배를 피우는 스물셋 언니들이 있었다. 왠지 그녀들은 내가 모르는 세상을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식으로 새로운 깃발이 꽂혔다. 스물셋이 됐다가, 스물다섯, 스물일곱을 찍으며 목표치를 갈아 치웠던 걸 보면, 마치 어딘가에 도달해야만 원하는 삶이 올 것처럼 조바심을 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집착은 강해졌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위해 휴학을 할지, 대학원에 가야 할지 현실의 고민이 쓰나미처럼 다가오던 시기. 나에게 ‘서른’은 너무도 까마득한 신기루 같았다. 지금의 불안을 견디고 나면 이내 도달할 오아시스 같았달까. 그때부터 막연히 서른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됐다. 뭔가 더 성숙하고, 지혜롭고, 명료한 나날이 이어지리라 기대했다.


내가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된 해는 2021년이다. 그러니까 흔히들 아홉수라고 부르는 스물아홉을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보냈다. 누군가 그 시기의 나를 본다면 어떻게 평가할까? 당시 나는 전 세계 80억 인구가 그러하였듯 골방에 들어앉은 신세였다. 심기일전 입사한 회사의 팀 분위기는 좌초하는 배 같았고, 애써 수료한 대학원은 논문을 못 써 휴학 상태. 그야말로 꽉 막힌 벽, 사면초가였다.


설상가상으로 사람마저 떠나갔다. 연인과는 이별하고, 친구들과의 인연도 끊겼다. 역병과 함께 재택근무의 시작으로 종일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 나날이 이어졌다. 퇴근 후 논문을 쓰기 위해 마지못해 향한 도서관에서는 가을날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다 꾸벅꾸벅 졸곤 했다. 창밖의 석양이 마치 사그라드는 나의 20대인듯해 처연함이 느껴졌다. 좋든 싫든 늘 사람들 사이에서 펼쳐져왔던 삶이었는데. 나를 찾고, 불러주는 이가 있었는지조차 의심되던 어느 날. 나는 아주 깊은 심연으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시기, 스물도 서른도 아닌 애매한 나이 아홉수의 기록이다. 돌이켜보면 글을 쓰며, 길을 걷으며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드문드문 난다. 많은 경우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길을 걸었다. 그러나 가장 또렷하고도 지배적인 이미지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다. 마치 기도하듯 엉덩이 무겁게 자리를 지키고 글을 읽고 쓰는 나의 모습.


서른이란 나이는 어른이 되는 관문 같다.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구나 통과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꿈꿔오고 상상해 온 어른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막막함이 이 시기를 힘들게 하고 자칫하면 조바심에 휩쓸려 악수를 두게 한다. 안주하기엔 아직 젊고, 경로를 바꾸기엔 내려놓을게 생긴 나이니까. 운이 좋게도 이 시기에 좋은 스승을 많이 만났고 그 이야기들을 길잡이 삼아 서른을 통과했다. 그 시기에 쓴 글도 함께 남았다. 앞으로 삶에서 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날 딛고 일어나게 해 줄 기록들이었다.


그렇게 쓰인 글을 엮어내기로 결심한 계기는 사소했다. 아홉수를 보내며 제주도를 자주 찾았다. 거기에는 어김없이 사랑하는 동생 지아가 있었다. 지아는 제주로 도망온 나를 재워주고 먹여주었고, 은신처를 제공해 준 친구다. 스물둘에 처음 만난 그녀는 언제나 내게 깊은 안정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새 서른을 앞두고 내가 지나온 늪을 통과하고 있었다.


지아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너무나 힘들지만, 서른 살 사춘기를 잘 보낸 나를 지켜본 덕분에 위로가 된다고. 그 말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어쩌면 나의 기록이 힘겹게 서른의 나이로 향하는 세상의 지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모든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진 않을 거다. 그럼에도 나름 서른에 집착해온 경력을 바탕으로 서른을 앞둔 사람에게는 어떤 공통적인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나처럼 목표지향적이고, 인정 욕구가 크고, 완벽주의자의 기질이 있어 앞만 보며 달려온 사람에게는 더더욱.


이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첫 번째 키워드는 ‘나’이다. 내가 나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해법을 찾아 헤맸던 기록이다. 흥미롭게도 동서양은 서른을 통과하는 즈음에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인다. 아홉수, 삼재, 토성리턴, 이립 같이 흔히 들어본 단어들이다. 나는 이 단어를 사회가 흔히 소비하는 방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나만의 정의를 내리고 내 삶에 적용해 보았다. 또한, 나를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 다양한 도구를 활용했던 과정을 모았다.


두 번째 키워드는 ‘너’이다. 이 파트에서는 내가 관계를 통해 나를 발견한 과정을 모았다. 서른의 초입에 선 사람은 그간 맺어온 관계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가족, 친구, 연인과의 관계에서 나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 있다면 이제 놓아줄 시간이다. 그러나 고통을 직면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파트에서는 그 시기 가장 나를 아프게 했던 고통을 어떻게 마주 보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소개한다.


세 번째 키워드는 ‘우리’이다. 나에서 너로 관점을 전환한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다음을 고민하게 된다. 새롭게 발견한 나를 세상에 어떻게 내보여야 하는지로 시야가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우리는 돈이라는 가치를 환산받는다. 여기서는 간절히 꿈꾸던 회사에 입사한 이후 시작된 내적인 갈등과 이를 해소하고자 썼던 글들을 모았다. 직업과 커리어 그리고 소명에 대한 생각의 기록들이다.


지난 시간을 정리하며 재밌는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우리나라가 만 나이를 도입한 2023년 6월, 나는 다시 한번 국가가 인정한 서른 살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2020년 시작된 나의 아홉수는 그 시기에 비로소 매듭을 지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되기까지 이토록 많은 시간이 걸린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내가 배운 분명한 사실은 기나긴 고독의 터널을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빛이 비친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자양분이 된다는 것이다. 서른이란 나이에 대해 숙고하고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던 과정이 누군가에게 자그마한 영감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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