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유스 (YOUTH)

어떻게 죽을 것인가

묻는다.
인생은 심플한가?



“인생 별 거 있냐?”라는 말에 공감하는가 묻는 것이다. 난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어쩌면 심플한 것이 맞는 것이다. 다만 심플을 유지하기 어려울 뿐이다. 왜냐면 삶은, 계란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이며 실전이며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욕심이 끝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죽을 때 존재감 없는 놈으로 남기 싫기 때문이다. 심플 이상의 뭔가를 남기고 싶어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것 때문에 복잡해진다. 이렇게 시작된 복잡한 머릿속은 욕망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한참을 헤맨다. 그러다 결국 결론을 내린다, 심플한 게 좋다고... 그런데 이걸 어쩌나, 결론은 심플인데 머릿속은 이미 실타래가 되어 휘엉퀴엉, 심플은 이미 요단강을 건넌 것이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고 웃프기 그지없는 것, 그게 우리네 인생이다.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노년의 인생은 심플한가?


이쯤되면 “그렇다”라고 대답하기 훨씬 쉬울 것이다. 나이를 거꾸로 세면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인생에 뭐 그리 복잡한 게 있으랴 여겨질 것이다. 소변 네 방울도 제대로 못보는 판에 특별한 욕망이 뭐 있을까 싶을 것이다. 움직이기도 번거로우니 그저 공기 좋은 별장같은 곳에서 살았으면, 죽기까지 그저 육체적 고통이나 겪지 않았으면, 가족들이나 힘들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전부일 거라 여겨질 것이다.



주인공 프레드가 그렇다. 그는 베네치아 오케스트라를 24년간 상임 지휘했던 은퇴한 노년이다. 스위스의 한 고급 호텔에서 휴양을 보내는 중이다. 영광을 누리며 살아온 그는 말한다, “어떻게 늙는지 모르게 나이가 들어버렸다”고... 늙어버린 것에 대한 체념이다. 늙으면서 삶을 달관하는 거야 그러려니 하지만 이 주인공은 도가 좀 넘은 상태다. 툭툭 던지는 대사마다 아주 염세적이다. 쇼팬하우어의 재래가 따로 없다. 그 정도로 모든 걸 내려놓은 그에게 어느날 영국 왕실 특사가 방문한다. 기사 작위 수여할테니 필립 공의 생일날 그의 마스터피스를 연주해달라 청하기 위해서다. 특히 그의 마스터피스를 위해 소프라노 조수미를 섭외하겠다고까지 한다. 그는 딱 잘라 거절한다. 가장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 사랑하던 아내를 위해 작곡한 것이므로 아내 말고는 그 누구도 부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다. 속이 익을대로 익은 철학자의 신념일까 아니면 쉰내 나는 노인네의 체념섞인 똥고집일까? 딱히 욕망하는 것 없이 심플해 보이는 노년의 그를 소재로 그렇게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엔 노년의 인물들뿐 아니라 많은 청년 인물들이 등장한다. 노년의 인물로는 영화감독인 그의 친구 믹(영화의 반전은 이사람으로부터 비롯된다,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늙은 여배우, 마라도나, 승려 등이 등장하고 청년의 인물로는 그의 딸, 딸의 애인들, 젊은 배우, 마사지걸, 미스 유니버스 등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이 두 상반되는 그룹의 인물들을 교차시키며 진행된다. ‘그레이트 뷰티’를 만들었던 감독의 차기작이니 이 영화 역시 뻔한(인생은 60부터 식의) 이야기를 건네려는 건 아닐 것이다. 전작은 그레이트한 도시 로마에서 뷰티풀한 인생을 살았던 한 노년이 진짜 아름다움을 찾는 여정을 담은 것이고, 이번엔 베네치아에서 전성기를 살았던 노년이 뭔가를 깨닫는 이야기다. 또 전작에선 주인공이 스스로 뭔가를 찾는 능동적 주체로 나오지만 이 영화에선 반대로 타인들로부터 영향받는 수동적 주체(차라리 객체)로 나온다. 고작 호텔이라는 곳에서 주인공의 주변인물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또 주인공은 타인들의 사건들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게 되는 걸까?영화는 이미 제목으로 그 주제를 암시하고 있다. ‘Youth’... 젊음이란 무엇인가? 아주 간단한 이 질문의 의미를 한 늙은이의 시선을 통해 재해석 하려는 것이다.



각 인물들은 나름대로의 사건들을 통해서 가치관의 변화를 겪게 된다. 가령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면서도 유치한 히트작 하나로 기억되는게 싫어 회의감에 빠졌던 배우는 한 어린 아이의 한마디변화를 결심하고, 실연당한 충격으로 좌절했던 주인공의 딸은 한 산악인에 의해서 변화한다. 노년의 마라도나는 미래를 떠올리며 자신의 환생을 꿈꾸고 승려 또한 공중부양을 성공시킨다. 등등 많은 인물의 변화들을 보여주는데 가장 중요한 변화는 친구인 믹의 변화다. 아주 각별한 장치역할을 한다. 젊은 시절의 영광(이미지, 껍데기)에 집착하며 현재의 자신의 모습(실체)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에게 어느날 동료였던 늙은 여배우가 찾아온다. 그리곤 그에게 정신 차리라며 7분여간 혹독한 비난을 가한다. 자신의 집착이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떻게 변화할까?그의 선택은 뜻밖에도 자살다. 가짜 세상(이미지, 껍데기)의 내가 죽으면 진짜 세상의 나(실체)도 죽는다는 매트릭스의 시뮬라르크 이론을 보는 듯 하다. 영화는 모든 출연자가 긍정적 변화를 선택할 거라는 진부한 예상에 그렇게 뒤통수를 친다. 요란하지 않지만 묵직한 반전이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믹의 죽음은 여러모로 '신의 한 수'다. 실체보다 이미지를 먹고사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투영시켜 영화에 자칫 부족할 뻔 했던 현실감을 채우는데도 톡톡히 일조했으며 체념과 염세로 가득했던 주인공의 남은 인생마저 극적으로 변화시킨다. 여튼 영화는 삶의 에너지를 잃었던 다양한 사람들의 반전 스토리를 제시하며 주제를 풀어간다. 그리고 영화 후반, 주변인물들의 여러 사건을 관조하던 주인공은 결국 젊음을 되찾는다. 아니, 체념한 노년이 아닌 또다른 목적와 의미를 깨달은 노년의 길로 들어선다.


개인적으론 이 영화에서 마음에 안들었던 부분이 제목과 포스터다. 이렇게 좋은 주제 전달을 시도하는 영화의 제목이 겨우 ‘Youth’라니, 게다가 ‘젊음’이라는 제목에 포스터(포스터는 몇가지 버전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미스 유니버스의 뒷태를 내세웠으니 누가 봐도 오해하기 딱 좋게 생겼다. 그러나 영화는 제목과 포스터의 오해소지와는 달리 한 편의 대박 우아한 종합예술로 절정을 달린다. 인물간의 철학적 담론들은 기본이고 시각적으로는 현대의 개념미술을 연상시키는 영상들 종종 지나간다.

촬영기법과 시각효과에 신경 참 많이 썼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어렵지 않다. 게다가 사운드 볼륨을 올리면 귀가 즐겁다(간만에 영화를 보면서 음악제목을 알려주는 스마트폰 앱을 여러번 돌렸다). 주요 배우의 연기력도 아주 좋아서 몰입을 돕는다. 주인공으로 분한 마이클 캐인은 시종일관 아주 안정적이고, 후반에 느닷없이 등장하여 논스톱 7분을 소화하는 제인 폰다는 “이게 연기다”라는 걸 보여주듯 강렬하게 어필하고 퇴장한다. 그리고 이 우아한 종합예술의 전개는 막판으로 갈 수록 힘을 더다. 그리곤 그많은 영화감독들이 모두 고민하지만 자주 실패한다는, ‘엔딩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놀라운 폭발력으로 마감짓는다. ‘헉’ 소리 나게 하는 그의 아내의 모습과 영국여왕의 등장, 그리고 그의 마스터피스... 영화는 심플한 인생만 남았을 것 같던 주인공이 삶의 끝자락에서 체념적 고집을 버리고 새로운 터닝포인트를 선택했음을 알린다(체념적 고집이 심플이었을까, 버린 것이 심플이었을까? 영화를 보면서 심플의 진짜 의미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아내가 아니면 아무도 부르게 할 수 없다던 그 마스터피스가 베일을 벗는다. 물론 그의 마스터피스를 연주하는 소프라노는 초반의 복선대로 조수미다(초반부터 등장하는 마라도나는 배우가 분한 가지만 조수미는 진짜 조수미다. 게다가 지휘봉을 든 주인공의 모습은 엔니오 모리코네를 빼다 박았다. 아마도 그에 대한 오마주일 것이다). 화룡점정, 이 우아한 영화의 엔딩 10여분이 통째로 조수미에게 몰빵이다. 시선이 안 갈 수가 없다. 노래도 아주 장중하고 우아하다. 이 노래 제목은... 안알랴줌. 이미 세간에 알려졌겠지만 내 입으로 말하기 싫다. 영화를 보면서 무릎을 탁 치기 바란다.



‘그레이트 뷰티’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소렌티노는 자신의 정신적 멘토가 페데리코 펠리니임을 고백한 적이 있다. 펠리니의 영화를 보다보종종  "앵?" 할만한 비현실적 영상들이 지나간다. 지금 보면 뭐 그리 대단한 영상도 아니지만 그 시절 영화가 사실주의를 지향했음을 고려한다면 일종의 혁신인 것이다. 위에 언급했던 현대의 개념미술처럼 보이는 상징적 이미지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건 그런 이유인 듯 하다. 그리고 서사구조도 전작처럼 약간 난해하고 장황한 편인데 펠리니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거라면 이 사람 영화의 종특인 것 같다. 엔딩도 마찬가지다. ‘유스’의 마지막 엔딩을 보고 ‘그레이트 뷰티’의 엔딩이 떠올랐다. 두 영화 모두 엔딩의 런닝타임이 길고 임팩트가 꽤 강하다. 두 영화를 보다보면 “아, 이게 소렌티노 영화구나”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색깔이 아주 뚜렷하다. 벌써부터 차기작이 궁금해진다.




자, 이제 다시 묻는다.
당신의 인생은 심플한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심플이란 무엇인가?


비슷한 질문을 뭘 그렇게 반복하 따지지 마시라. 전혀 심플하지 않은 이 애꿎은 질문은 내가 아닌 소렌티노(영화)의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