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일 포스티노 (IL POSTINO)

트로이지, 트로이지, 트로이지


한때 국문과를 다니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이 영화를 모르면 무식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그 영화에 깔려있는 ‘은유’에 대한 다양한 복선들 때문이었을 것이고 또 혹은 ‘네루다’라는 유명한 시인(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등장때문이었을 것이다. 난 국문과 출신도 아니고 그당시 네루다의 시를 읽어본 것도 아니지만 이 영화를 처음 보고난 후 뭔가 멘탈이 무장해제 당하는 느낌을 경험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영화를 보면 가슴이 쎄하다.


누군가가 내게 이탈리아 영화를 소개해 달라 한다면 이 영화를 단연 1순위로 꼽는다. 혹 영화사의 테두리 안에서 명작을 꼽아달라 언급한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촌 영화계를 주름잡던 이탈리아의 신사실주의 영화들을 꼽는 게 무난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영화를 추천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빈티지스러움으로 대변되는 이탈리아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은유’라는 코드를 곳곳에 심어 스토리를 직조한 각본도 일품이고 그 무엇보다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무게감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몇가지를 언급하자면, 신사실주의 이후 내리막을 걷는듯 했던 이탈리아 영화가 잠시나마 주가상승의 오르막을 탔던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 오르막의 정점은 두말할 나위없이 최근의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e’ bella)다. 물론 이보다 더 최근, 2014년 아카데미와 깐느를 비롯한 많은 영화제에서 수상과 후보를 검어쥔 ‘그레이트 뷰티(La grande bellezza, 2013)’가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소 난해한 구성으로 인해 대중성에 성공하지 못했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아카데미 시상식 광란행동 만큼이나 놀라웠던 ‘인생은 아름다워’의 임팩트에 비하면 ‘그레이트 뷰티’의 영향력은 별 거 아닌 것이다. ‘인생은 아름다워’가 하도 떠들썩해서 행여 베니니가 그 이전부터 이탈리아 영화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인물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베니니의 입지가 본격화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일 포스티노’의 주연을 맡았던 ‘막시모 트로이지’의 죽음(1994, 당시 나이 41세)과 맥을 같이 한다. 트로이지가 죽기 전까지 베니니는 오랫동안 트로이지의 입지에 가려진 배우였었다. 가령 1984년에 둘은 동시감독과 주연배우를 하며 ‘Non ci resta che piangere’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주제로 한 이 영화는 이탈리아에서 충분히 성공을 거둔 작품인데 이 영화의 메인감독은 엄연히 트로이지이며 배우로서도 메인이 트로이지이고 베니니는 서브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탈리아 영화계 일각에서는 ‘트로이지가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았다면 베니니의 글로벌한 출세는 시기가 늦추어졌거나 아예 없었을 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모든 건 다 운명이었을까? 트로이지의 죽음도 그로인해 베니니의 출세가 앞당겨진 것도 모두 필연이었을까? 어처구니 없게도 트로이지는 ‘일 포스티노’의 마지막 촬영을 끝낸 후 불과 12시간만에 사망했다. 오랫동안 앓고있었던 심장병 때문에 하루에 한두시간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한다. 휴식과 치료를 권유하던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며 촬영을 고집했고 그렇게 죽음과 바꾸며 찍은 영화는 베르톨루치 이후 내리막길이던 이탈리아 영화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 영화는 그해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5개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그 자존심 세던 아카데미 영화제는 22년만에 이례적으로 외국영화를 작품상에 후보에 올리는 동시에 트로이지도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렸다.


이렇다할 자본에 의지한 것도 아닌데 국제적으로도 30여개에 이르는 영화제에 이름을 올리며 가치를 인정받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가던 시절, 배멀미로 이민을 가는 것조차 엄두를 못내는 한 청년의 이야기다. 사는 곳이 워낙 촌동네라 구할 직업도 마땅히 없는 어촌인데 그 동네로 누군가 정치적 망명을 온다. 공산주의 혁명과 사랑을 주제로 기가막힌 시를 쓰는 칠레 시인 ‘네루다’가 그 주인공이다. 가진 거라곤 자전거 하나가 고작인 이 청년은 그 네루다가 기거하는 집에 우편물을 배달해주는 일을 시작한다. 네루다와의 조우가 거듭되면서 숨겨져있던 그의 놀라운 시적 재능이 드러나기 시작된다…(스포일러 생략)

영화를 구성하는 형식적 모티브는 각종 ‘은유’를 통해 둘로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군상들이다. 권력에 눈이 어두워 감언이설을 내뱉는 의원, 공산주의자들은 어린애를 잡아먹는다 말하는 신부등은 당시의 삐뚤어진 자본 이데올로기를 은유하며, 그 자본의 유혹에 자존감을 모두 내팽개치는 문맹의 숙모와 조카딸, 그리고 마을사람들은 상대적 노예를 은유한다. 고작 또다른 노예에 불과한 삶을 살던 주인공은 우연히 공산주의 이념을 소유한 시인을 만나면서 일종의 해방을 쟁취하는 과정을 겪는다. 어찌보면 정답이라고 단정짓기도 애매한 특정이념에 뭐그리 가치부여를 할 필요가 있느냐고 지적할 수도 있지만 이 스토리의 진짜 본질은 정치적 이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삶이 과연 무엇이냐고 관객에게 묻는 지점이다.

네루다는 원래 시의원이었던 사람이다. 평안한 삶을 살았던 그는 어쩌다가 하층민의 삶에 영혼을 빼앗긴 것일까? 주인공인 우편배달부도 자본의 유혹에 넘어가는 가족들과 대립하며 그의 재능에 인생을 건다. 그렇게 현실의 유혹과 대립하는 그의 심리적 갈등구조가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일 것이다. 영화 중간, "인간으로 살기가 너무 힘들다"라는 주인공의 고백은 그래서 퍽이나 의미심장하다. 돈과 명예를 쫒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상위개념, 그것에 인생을 거는 것, 그게 진정한 인간의 삶이 아니겠냐고 말을 건내는 것 같다. 그 외에도 영화 내내 던지는 인생담론들의 복선들이 하도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긴 지면이 부족하다. 직접 보기를 권해드린다.

뒤늦게 발견한 정체성과 자존감으로  여태껏 없던 주체적 삶을 선택한 주인공의 스토리가 당신에게 무엇을 남기는지 시험해 보시라. 너무 치열하게만 살고있는 자신을 잠시 생각해보라며 ‘인간답게 사는 법’을 주제로 수많은 인문학 강의가 유행하는 이시대에 이런 영화 한편은 우리에게도 걸맞는 커다란 울림이다.

네루다와 그의 시, 주인공 트로이지의 해학적이고 진지한 언어들,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그의 죽음과 남겨진 유작, 그리고 그의 경이에 가까운 배우로서의 연기력... 


긴 말이 필요없다. 이건 그냥 봐야한다.

그리고 트로이지는... 죽지 말았어야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스 (YOUTH)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