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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뷰티 (LA GRANDE BELLEZZA)

출세한 그가 헛헛함을 느끼는 이유

당신은 ‘늙은이 집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 죽어가는 사람의 냄새, 내 몸에서도 언젠가 날 냄새라 생각하면 그냥 싫다. 푸른 꽃잎이 누렇게 바래다 떨어지는 건 그다지 흥겨운 일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죽음을 ‘아름다움’이라 여긴다면 조금은 골머리 아파진다. 허나 죽음의 미학에 관한 철학적 주제는 퍽이나 오래된 인간의 역사다. 소크라테스 시대의 수많은 입담꾼들의 주제도 결국 ‘진,선,미’가 무엇이냐를 놓고 벌이던 설전이었고 그 설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변기통을 전시해놓고 ‘이게 아름답지 않은 이유를 말해보라’던 뒤샹이 지난 세기를 대변하는 최고의 예술가 중 한명이라는 사실은 일면 삶보다 죽음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고전적 주제의 되새김일 것이다.

늙은 주인공 잽은 “나는 어렸을 적부터 ‘여자의 거시기’보다 ‘늙은이의 집에서 나는 냄새’를 더 좋아했다”며, 그래서 차별된 감수성을 소유한 글쟁이의 운명을 갖고 태어났었다며 자신을 소개한다. 그렇게 영화가 시작된다. 한편의 대박 소설로 출세하여 로마의 사교계를 수십년째 안방처럼 드나들던 그의 남은 소망은 ‘진짜 아름다움’에 대한 글을 남기는 것이다. 잘난 사람들 지겹도록 만나봤고 즐길만큼 즐겨본 그에게 남겨진 건 아름다움이 아닌 그저 권태로움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연 ‘진짜 아름다움’에 대한 글을 ‘죽음’ 이전에 남길 수 있게 될까?

영화의 진행장면들은 아름다움을 찾기 위한 주인공의 여정들이다. 배경이 로마이니 줄줄이 이어지는 로마의 명소들이 시선을 붙잡는 건 어쩔 수 없다. 영화제목 그대로 ‘위대한’ 로마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지나간다. 주인공의 집 옥상에서 바로 앞에 보이는 콜로세움, 주먹돌 모자이크로 꽉 메워진 나보나 광장, 소박한 수도원, 각종 예술품들, 그리고 영화가 끝난 직후 10여분 가까이나 롱테이크로 펼쳐지는 테베레강 파노라마 등… 심지어 영화 초반, 어떤 관광객은 쟈니콜로 언덕에서 로마를 구경하다 쓰러져 죽는데 그 와중에 나오는 성당과 합창은 마치 “죽어도 어떻게 로마에서 죽냐, 참 복도 많은 놈일세”라고 세뇌시키는 느낌이다(영화를 보고난 후 알았다, 이 장면이 영화가 종종 던지던 죽음의 미학에 관한 담론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갖가지 아름다운 배경뿐만 아니라 영화는 제목대로 ‘위대한 아름다움’에 걸맞는 로마인들을 곳곳에 출현시킨다. 고대의 유산인 거대한 상수로에 나체로 머리를 박으며 ‘Io non mi amo!’라 외치는 행위예술가, 파티장을 마구 뛰어다니며 물감을 퍼부어 그림을 그리는 소녀, 카라칼라 목욕장에서 대형 스케일의 쇼를 벌이는 마술사, 주인공의 친구로 등장하는 열정적인 희곡작가, 성공한 사회학자, 방송인, 바티칸의 한 추기경, 그리고 성녀 등… 어찌보면 그야말로 ‘그레이트 뷰티’란 이런 것들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로마의 풍경과 그 속을 사는 다양한 로마인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만일에 영화가 시종일관 이런 장면들을 나열만 하다 끝났다면 그건 장르영화도 다큐도 아닌, 아름답지만 지릴멸렬한 로마 홍보용 비디오로 전락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외국어 영화 대상, 그리고 골든 글로브에서 작품상 대상을 검어쥐었다. 감독인 쏘렌티노가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를 두고 자신의 멘토라 고백했을 정도면 적어도 영화계 지식인들의 부릅뜬 시선을 앞에 두고 뻔한 영상만 보여주진 않았을 거라는 얘기다(그러려면 차라리 변기통의 이유있는 반항류를 시전하는 것이 나았을테고). 영화적 반전을 위한 장치는 시작부터 준비된 거였다. 아름다운 로마와 그 속을 사는 상류층,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권태로운 주인공 잽… 슬슬 반전이 진행된다.

잽의 여정은 그 고상하고 위대해 보이던 행위예술가와의 인터뷰로 시작된다. 평소 무엇을 읽느냐는 잽의 질문에 행위예술가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무엇을 읽거나 할 필요없어요, 초감각과 진동으로 사니까요” 잽은 그 진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물으며 보편타당한 상식선의 설명을 요구하지만 행위예술가는 결국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한 체 망신만 당한다. 물감을 퍼부으며 그림을 그리던 소녀의 진실은 돈에 눈 먼 부모의 등살에 떠밀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것이고, 사회와 자식을 위해 평생 헌신했다던 성공한 좌파 사회학자의 진실엔 정치적 경제적으로 탄탄했던 뒷배경이 있었다. 티비에서 성공했다던 연예인은 마약으로 고단한 사생활을 살고, 심지어 한 추기경은 종교적 진리에 대한 물음엔 대답을 회피하거나 횡설수설만 늘어놓는다(세속의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굳이 추기경까지 들먹이며 로마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감독의 의지가 참 대단케 느껴진다). 그 외에도 추한 로마를 들춰내는 장면들이 더 있지만 이 영화의 진짜 영화적 가치는 이런 단순한 고발식 장면들이 아니라 에피소드 사이사이에 끼워진 죽음과 이별에 대한 담론이다.

이 영화엔 죽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또 로마를 떠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초반에 언급했던 그 관광객을 시작으로 문학청년이 죽고 첫사랑 엘리사도 죽고 애인 라모나도 죽는다. 그리고 이미 100세가 넘은 성녀는 죽음을 바로 앞에 둔 듯한 모습으로 산죠반니 세례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오른다. 또 죽음으로서는 아니지만 위대한 도시 로마를 떠나는 존재들이 있다. 정열적이던 희곡작가 친구 로마노도 로마를 떠나고, 성녀의 철새들도 로마를 떠나고, 카라칼라 극장쇼의 마술사도 로마를 떠난다. 이쯤되면 시나리오가 무지 진지를 먹은 거다. 생각해 보라, 죽음과 이별을 말하고 싶은 것은 그렇다치고 이 역발상과 반전의 배경을 왜 굳이 로마로 선택했을까? 수많은 동경을 받는 로마를 배경으로 영화는 상반된 장면들을 교차시키며 관객들을 골똘하게 만든다. 과거의 영광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위대한 로마에서 그 영광의 떡고물을 받아먹고 사는 것이 더이상 영광스럽지 못한, 더 나아가서 다분히 안쓰럽기 짝이 없는 삶을 사는 찌질한 일부 로마인들과 그 떡고물의 허상으로부터 과감히 이별을 선언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서의 죽음들… 이런 것들은 이곳 로마에서 다년간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번쯤은 느껴봤을 법한 낯설지 않은 상념들일 것이다. 감독은 그 안에서 찾고 묻는 것이다. ‘위대한 아름다움’의 진짜 정체 말이다. 감독은 나름대로 영화 후반부에 그 답을 내놓는다. 이미 스포일러는 너무 늘어놓은 듯 하고… 그 답을 비롯한 나머지는 직접 영화를 보고 헤아려 보시길 권한다.

솔직히 이 영화는 기,승,전의 서사구조나 무게에 비하면 결말이 무지 소박하다. 허나 그 어떤 철학적 질문이라도 답이 항상 복잡하거나 임팩트가 강해야하는 법은 없을 뿐더러 쏘렌테노나 우리의 대답이 펠리니의 대답과 같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당신에게 누군가 “로마… 좋습니까?”라는 식의 질문을 한다면 떠오르는 대답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뒤샹이 고작 변기통 하나를 들고와서 개념의 근원을 물으며 세상을 환기시켰던 것처럼 이 영화도 당신이 하게 될 대답에 몇가지 미사여구를 보태줄 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나서 ‘로마가 내게 남기는 것들’에 관한 문제를 다시 고민하게 된다면 아마도 쏘렌티노가 조금은 기쁘게 웃어주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필자는 이 영화를 세번 보았다. 머리가 나쁜 탓인지 영화의 진행중에 아름다움, 추함, 죽음, 이별등의 서사의 전환이 뭔가 복잡하고 매끄럽지 못하다는 느낌때문에 머리가 좀 고생했던 게 사실이다. 생각을 요구받는 게 버겁거나 140분을 넘기는 긴 런닝타임을 견디기가 벅찬 분들에겐 본문의 내용이 영화의 무게를 줄이는데 적게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끝으로 잡설 한마디,

대략 3년전 로마의 서해안에서 여객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다. 바로 몇달전 배가 인양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이 영화엔 그 바닷가에 엎어진 채로 남아있는 그 여객선을 주인공이 아무런 대사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의 로마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심리를 대변하는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뭐… 한국사람이라면 그 장면을 보자마자 뭔가 오버랩 될 것이다. 그걸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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