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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성당에서

머리와 가슴 사이

바티칸 박물관을 안내하던 날이었다. 운이 없게도 그날따라 시간이 없었다. 미켈란젤로 벽화를 미리 설명하는 건 택도 없어보였다. "시간문제로 그림에 관한 설명은 나중에 하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서둘러 들어갔다.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이것 참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의 지식이 전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일단 보라'는 식의 상황, 그게 그렇게 불편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뻘쭘하던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손님 가운데 한 사람이 천정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어라? 난 오늘 아무런 설명도 안했는데...' 잠시 후 밖을 나와 자유시간을 주었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그 손님을 찾아 물었다.

"아까 우신 거 맞나요?"

"네"

"왜 우셨어요?"

"너무 감동적이어서요"...


난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흔히 볼 수 없었던 '관람자의 눈물'이어서가 아니라 미궁속에 빠져버린 '나의 역할'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다. 그 공간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으되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손님을 보게 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그날이 하필 나의 설명이 없었던 유일한 날이라니...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참 별일이다 싶었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쩌면 나의 다분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설명들이 여태껏 듣는 이들의 감동회로를 방해하는 역할을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이후 한동안은 이 바닥 일에 대한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 숭고미 - 미적 범주의 하나. 자연을 인식하는 ‘나’가 자연의 조화를 현실에서 추구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미의식이 나타난다.

인간의 보통 이해력으로는 알 수 없는 경이(驚異), 외경(畏敬), 위대함 따위의 느낌을 준다.  --  네이버 사전 >>>


현시대 예술은 감동적인가? 예술이 진짜로 종말을 고한 것인가에 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숭고'라는 표현을 언급하며 미학이론에 흔적을 남겼던 고대와 근대의 철학자들이 지금의 숭고논의를 보며 뭐라 말할지 모르겠으나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기괴하고 이해못할 행위들을 보며 하늘에 있을 그들도 생각이 복잡하지 않을까 싶다.


반복되는 현실은 지루하고, 공상을 표현하는 SF도 왠만해선 신선감이 없고, 왠만한 재앙엔 눈하나 꿈쩍않는 지금, 대중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고상함보다는 뭔가 더 신선하고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한다. 단순한 자극을 쿨한 미덕으로 여기는 이 시대에 진하고 깊은 감동을 전달할 수 있는 코드는 무엇일까? 벽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그 손님은 대체 그순간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예술적 수준이나 감동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행위가 반드시 커다란 덩치여야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한 덩치 내세우는 것들만 생각해 보자. 현대미술의 한 장르인 대지예술의 경우,  커다란 건물을 포장하는 것 뿐 아니라 무지막지한 헝겊으로 산맥을 포장하기도 한다. 분명 놀라운 볼거리다. 일생에 본 일도 없는 거대한 포장의 과정을 직접 지켜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영역을 좀 더 좁혀 그림을 생각해보자. 한 주체가 직접 그린 가장 큰 그림은  또 무엇일까? 바티칸을 다녀간 사람이라면 아마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아니겠느냐고 대답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물론 정답이 아니다). 길이만 40여미터 되는 그 거대함을 대하는 감정들은 얼마나 가지각색일까? 아닌 게 아니라 그들중 많은 사람들은 그 스케일로부터 받는 압도감이나 제압감 같은 걸 느낌으로서 그 어떤 숭고함에 일면 무의식적으로 빠져들 수도 있을 것이다. 감동의 본질, 그 손님이 보였던 눈물의 정체, 그걸 내가 어찌 일일이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다만 '그림 설명'이라는 행위로 입에 풀칠을 하는 입장에서 지면을 통해 약간의 자진납세 좀 하려한다.


근대 이후 최근까지도 수많은 스켄들에 휩싸여 갖은 고초와 영광을 몰고다니는 다 빈치의 모나리자, 혹은 몇년 전 8250만 달러에 팔렸다는 고흐의 그림도 마찬가지겠지만, 건물의 천정에 떡하니 들러붙어 우러러 보게까지 하는 그 그림, 역사책이나 교과서에 절대 빠지지 않는 예술가의 것인데다 지구촌 대략 10억의 인구가 섬기는 신의 위대한 업적을 표현한 것이라면 대중적인 관심을 끌기엔 조건들을 충분히 갖춘 셈이다. 그렇다면 그 그림은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선사하는 것일까? 12시간의 비행기 여정에, 피곤한 몸과 아픈 다리 주물러 가며 줄을 서서 들어간 이후, 다크서클 늘어진 눈으로 그 그림을 바라보며 드는 만감들이 무엇인지 매번 그곳을 드나들 때마다 그것이 궁금하더라.


TV 방송중에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가 있다. 생활의 다양한 직업군에서 일하는 숨겨진 재주꾼을 찾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자르기, 굽기, 바르기, 만들기, 정리하기, 나르기 등… 업종도 다양하고 기네스북에 오르고도 남을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들의 삶의 현장을 취재한다.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라 더 살갑고 정감이 가지만 개인적으론 정감보다 연민의 감정이 앞선다. 그들이 선보이는 능력들의 컨셉은 대부분 ‘신속-정확’이다. 그들의 신속정확한 능력은 경지에 오르고 싶은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 훈련한 것도 아니요, 예술행위처럼 자아를 표출하고저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닌, 그저 생존의 압박이 낳은 피땀의 결과일 뿐이다. 그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피할 수 없는 건 어쩌면 그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고 내가 속한 집단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피땀나게 반복되는 단순한 노동행위의 결과로 나타난 놀라운 솜씨의 ‘생활’의 달인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를 생각하면 신속-정확한 서비스를 자랑으로 여기는 한국사회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얼추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 달인들을 향해 오만한 연민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각설하고, 달인인 그들의 노동이 과연 숭고한 아름다움인가? 미켈란젤로의 노동은 숭고하고 그들의 노동은 숭고하지 않은가? 직업에 관한 귀천과 사회적 시선, 그리고 경제적 보상, 그런 것을 떠나 숭고함을 논하는 것은 얼마나 합당한가? 생활의 달인을 보면 그렇게 만감이 교차한다.

신속,정확이 아닌 또다른 능력, 가령 끈기와 배짱을 도구로 하여 달인임을 증명하는 일, 그런 노동은 또 얼마나 숭고한 걸까? 짐작컨데 그 천정화의 장대한 스케일은 500여년전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각별한 놀라움과 숭고함으로 어필되었을 것이다. 크기나 종교적 여부를 중요한 조건으로 여기지 않았던 근대적 개념의 형태로는 아닐지라도, 숭고미학을 처음 언급했던 고대 그리이스의 기준(크기와 종교적인 정도를 중요조건으로 여겼던)에 부합하는 미학적 숭고함은 500여년 전에도 그렇게 살아있었던 셈이다(어라, 말하고 보니 이것도 고대가 다시 탄생한다는 '르네상스'의 사전적 의미에 맞닿는다. 참 많은 것들이 리메이크 된다 르네상스 때는). 지금도 왠만한 사람에게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보는 순간이 일생에 봐왔던 그림중에 가장 큰 그림을 보는 순간일 것이다. 그림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한 감정에 고대나 현대의 숭고미학을 대입시키는 일이 그닥 억지스런 일이 아니라 믿는 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다. 특히 천정에 그려진 천지창조가 일단 그 거대함과 종교적 개념의 숭고함을 어필한다면 정면 벽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은 또다른 개념의 숭고함을 어필한다.

최후의 심판에 얽힌 구설수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교회의 세속권력이 정점에 달하고 적잖이 혼돈이었던 시대,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화가는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화가라는 그의 자리에서 그림이라는 도구를 통해 당시의 이념에 돌을 던짐으로서 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숭고함의 진정한 의미를 되묻는다. 성인들을 벌거벗기고, 의전관을 지옥에 그려넣고, 흑인을 구원하고... 요새 식으로 대입하면 국회의원과 장관들을 벌거벗기고, 국무총리를 지옥에 그려넣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천국으로 구원하는 장면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그림을 청와대 한쪽에 그렸다 가정해보자. 어떻게 될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이 시대를 살면서도 이런 상상을 노출하는 건 여전히 불편함이다. 하물며 그 시대엔 오죽했겠는가?


미켈란젤로는 두 그림에 10년 이상의 세월을 바쳤다. 쿨한 가벼움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10년의 끈기와 목숨을 담보로 하는 배짱이 낳은 그림이라는 도움말을 건넨다면 얼마만한 감동으로 전달될지 난 알 수 없다.


난 다만 사람들이 잠시나마 그 정적인 결과물로부터 인간의 피땀의 가치를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신속정확하게 그린 그림은 컴퓨터그래픽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고 거대한 스케일의 살아움직이는 그림은 아이맥스 영화관이 압권이다. 왠만한 우리들은 컴퓨터그래픽이나 영화에 대한 이론을 잘은 모르지만 그런 것들로부터 감동과 흥미를 느끼는 것에는 아주 익숙해져 있다. 훈련된 결과가 아니라 훈련없이도 가능한 ‘말초신경을 자극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들의 이성과 상상력을 곧추 세우는 일은 조금은 골치아픈 일이다. 행복한 대인관계가 의욕만으로 얻어질 수 없듯, 예술품과의 교감도 의욕만으론 되기 어려울 것이다. 숭고함이란 것이 마음만 먹는다고 저절로 가슴에 꽂히는 그런 싸구려 개념이었다면 많은 사상가들이 그 단어를 두고 고민이나 했겠으며 현대예술을 대표하는 언어 중 하나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아날로그의 가치는 느림이며 휴머니티다. <나는 가수다>, 혹은 <불후의 명곡>에 나오는 기계를 도구로 한 디지털 감동은 며칠 자고 나면 쉽사리 잊혀진다. 그 자체로 휘발성인 경우도 많지만 새로운 듯 비스무리한 제품이 확대 재생산되어 감동의 자리를 대신 메꾸는 일이 너무 자주 반복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것이 자본이윤을 전제로 철저하게 계획된 기계적 퍼포먼스라는 것이다. 과장된 목소리, 과장된 사운드, 과장된 조명... '이래도 감동을 안받을 거냐?'며 감동을 강요하는 느낌, 지금의 음악 흐름을 대표하는 그 프로그램은 역설적으로 디지털의 명확한 한계를 시전한다. 차라리 그냥 2천년된 돌판에 앉아 촛불을 켜는, 마이크도 스피커도 없는 원시적 쌩라이브, 때론 그런 것들이 훨씬 지속적인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베로나가 100여년 이상 똑같은 재래식 공연을 하면서도 세계인들의 발길을 이끄는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돌과 어둠과 촛불과 별빛과 인간 사이의 타협없는 순수한 노동이 만들어내는 감동, 그 잔상이 오래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인간은 디지털이 아니기 때문이다. 카메라 셔터를 눌러 쉽게 담은 영상보다 연필 한자루 쥐고 하나하나 그려나가는 그림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로서의 인간이 아날로그로부터 더 진한 감동을 받는다는 건 불변의 진리다. 난 그걸 믿는다.    

내일도 못해먹을 짓을 해야한다. 하늘에서 미켈란젤로가 나를 내려다 보며 뭐라 생각할까?


"야 이놈아, 니가 나를 얼마나 안다고 떠드는고? 니가 내 뼈를 깎는 고통을 진짜 이해하는고? 목숨을 걸고 권력에 돌을 던진 내 용기를 진짜 아는고? 알면 한번 해보지 왜 그러고 있는고? 하다못해 들판에 나가서 스무가지 색깔의 물감을 한번 만들어 봐라, 그게 사람이 할 짓인지. 너도 참... 예술의 고뇌를 책으로만 배운 주제에 입에 풀칠한다고 애쓴다 애써... "  



<예술품들에 가장 많은 상처를 입히는 자들은 바로 평론가>라는 말을 난 이제사 겨우 이해한다. 작품이 있기까지 쏟아냈던 한 예술가의 수많은 고민과 영혼의 무게를 책상머리에 앉아서 너무 쉽게 재단하는 건 상처를 남기는 일이 분명한 것 같다.



위 네이버 사전의 해석, <자연의 조화를 현실에서 실천한다>는 의미와 <인간의 이해력으로는 알 수 없는 범주>를 숭고라 표현한다는 명제는 나로선 반론의 여지가 없다. 반면 예술품 앞에서 눈물 한번 흘려본 일 없는 내가  한 예술가의 10년에 담긴 고통스럽고 숭고한 노동의 결과를 단 몇십분 만에 후다닥 편집하여 입밖으로 내는 일, 그건 별로 숭고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나는 매번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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