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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 (AGORA)

기록이 꽃이 되려면

기록은 중요하다. 지나간 기록은 역사가 되어 후대에 살아 숨쉰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수많은 철학서든 세상의 모든 가르침은 기록이기에 권위를 갖는다. 그 장엄한 스토리들이 고작구전되어 떠도는 설화에 불과했다면 어땠을까? 뼈대없는 가문으로 여겨지듯 전락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자칫 유치뽕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던 '로빈훗'이나 '홍길동' 같은 구전설화의경우도 마찬가지다. 입에서 입으로 돌던 수다거리가 나중에기록으로 각색되어 인기있는 소비품목으로서 그 존재가치가업그레이드 된 것이다. 기록의 속성은 그러하다. 아무리 이야기가 그럴싸 해도 그 모든 것은 '기록됨'으로서 빛을 발하며의미를 갖는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을 때 너는 비로소 꽃이 되는 것’이고 그것을 기록하면 그 순간부터 너는 영원히 꽃으로 남는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이름뿐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이 남는다면 죽어도 죽는 게 아닐 것이다. 예수를 비롯한 수많은 현자들이 여전히 지대한 영향력으로 살아 숨쉬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기록은 일종의 생명이다.

 

기록들이 소실되었다. 인류역사 이래 가장 많은 양의 기록들이 파괴되었다. 세상의 모든 기록을 다 보유하리라는 야심은결국 그렇게 끝이 났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자리를 이어받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세운 불가사의, 바로 그알렉드리아 도서관의 기록들이다. 영화 '아고라(2009, 국내미개봉작)'에 나오는 그 도서관 파괴 장면은 별 대단한 스펙타클도 아닌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만일 그 기록들이 모두 살아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고대의 미스테리'라는말은 애초부터 없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피라미드나 판테온의 건축기술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기인하는 것인지를 두고오랜 세월을 낭비하지도 않았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중세가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은 다음 여름휴가때 인터스텔라의 어딘가를 계획하며 설레어 할 지도 모른다.

영화 '아고라'의 갈등구조는 <종교vs과학>, <종교vs정치>, 그리고 <종교vs종교>다. 사실 이 익숙한 주제를 풀어가는 과정은 다른 영화에 비해 그닥 탁월할 게 없어 보인다. 다만 당시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관장이었으면서 최고의 여성 수학자였던 ‘히파티아’라는 인물을 통해 주제전달을 시도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도서관 자체가 주는 상징성 못지 않게 히파티아라는 인물의 시대적 상징성도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도 등장인물이 많아서 1차적 도상단계 만으로도 할 말이 많을 수 밖에 없는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그그림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당당히 서있는 딱 한명의 여자,그녀가 바로 히파티아다.

영화를 보면서도 자연스레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녀는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수학 교수였던아버지의 영향으로 당시 최고의 수학자 가운데 한사람으로성장한다. 수학, 천문학등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도 당시민감했던 종교적 입장, 특히 기독교에 대한 배타성을 가르치치 않았으며 온정과 고매한 인격으로 모두를 포용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결국 주교였던 키릴로스로 인해 정치적 타살의위험에 놓이게 된다.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기독교로의 개종조차 거부하며 그녀는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당시 지식을 갖춘 여류 석학으로서 히파티아가 유일한 존재는 아니었겠지만 이후 시대의 수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그녀의 존재가 언급되는 걸 보면 영화에서 표현된 그녀의 존재감은 결코 과장은 아닌 것 같다. 하여 혹 누군가 히파티아가죽은 시점을 두고 고대의 철학이 막을 내린 시점이라고까지표현한다 해도 전혀 허무맹랑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로 인해 그녀의 저술서도 대부분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도서관은 파괴되었는가? 학자들의 추정으로는 서너차례에 걸친 정치적 사건들로 인해 점차 파괴되었다는데 영화는 그 중 하나였던 일명 ‘세라피스 신전 약탈’에 초점을 맞췄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모아놓은 책들은 그 수량이 대략 50여만권이었다 한다. 물론 지금처럼 두꺼운 판본이 아니라 파피루스 재질을 둘둘 말아놓은 형태다. 그래도 그 스케일이 당대로서는 지구촌 최고였다 하니 얼핏 우리의 유산으로서는적수가 없을 것 같다. 조선 500년간의 실시간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은 책으로 2천권을 갓 넘긴다. 50여만권에 비해서 2천권이면 적수라 하기엔 택도 없다. 숫자를 따지자니 8만대장경이 적수가 될까 싶지만 실제 대장경에 쓰여진 글자수는 5천만자 내외로 조선왕조실록과 비슷한 수준이다. 고대 최대의 지식 저장창고였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규모는 이처럼실로 대단한 것이다. 기록유산으로서는 전세계 어디에도 그도서관을 필적할 만한 적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국내에 진짜 적수가 따로 있다.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조선의 승정원이 남긴 기록이다.

말하자면 국정 전반에관한 공무기록 정도로 볼 수 있는데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앞으로 향후 50년 안에 번역이 완성될지 장담할 수 없으며 글자수로만 따져도 2억 5천만자나 된다. 그런데 그게원본의 절반에 불과하단다(이 마저도 단일기록으로서는 현존 세계 최대). 나머지 절반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는데 그렇다면 실제 쓰여진 글자수가 대략 5억자 가량 된다는 말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피루스 한 장에 몇 개의 글자가적혀있는지 알 순 없지만 50만권이 5억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한다면 둘둘 말려있는 파피루스 한장에 천자 분량이적혀있어야 한다는 얘기다(파피루스 하나와 천자문 한권 중어떤 게 더 많은 글자수를 가졌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생각해보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야심으로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글로벌 옴니버스 형식이지만 조선의 기록은 왕실내부만의 기록으로 그 성격이 전혀 다르며 게다가 기록을 시작한 이유의 진정성과 과정의 굴곡을알고나면 입이 떡 벌어진다.

참고로 예를 들자면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것은, 왕이 매화틀에 대변을 본 것이 몇일 몇시인데그날 대변의 향과 맛이 이러저러한 고로 왕의 건강상태가 어떻다는 얘기마저 적혀있는 것이고, 승정원 일기는 이조판서가 몇날 몇시에 어느 술집에서 누구에게 술을 따랐다는 얘기마저 적혀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궁궐 안팎의 내용들을 성역없이 5백년동안 쉼없이 기록했다는 게 믿겨지는가? 누군가 왕과 관리들 옆에 붙어다니면서 끝임없는 속기록을 남겼다는 얘기다(보통 2명으로 '사관'이라 하는데 TV 사극에 안보이는 경우가 많다, 왕 옆에 항상 붙어있어야 한다). 그렇다면궁궐안에서의 공적비밀은 애초에 싹을 자르는 것이 국정철학이었다는 얘기고 공무는 말 그대로 철저하게 공적인 임무가된다는 얘기다. 권력을 쥐고있는 입장에선 어지간히 불편한일이었을 그 기록을 한 국가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으로부터 5백년동안 흔들림없이 지속했다면 그 정체성의 품격이 보통은 아닌 것이다. 지금의 현대인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에대한 이미지가 성장기보다는 쇄락기에 많이 편중되어 평가절하된 상황은 다소 안타까운 면이 있다. 그 이유로 일제 강점기의 영향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자부심을 느끼지 못하도록, 아니 민족수치심을 느끼도록 받았던 교육의 영향이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건 대한민국 근대사의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100여년전 조선 말기와 대한민국 정부수립 시기의 하늘 색깔을 보고 여러사람이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 다양한 기록들을 후대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그때는하늘이 푸른색이었다” 혹은 “붉은색이었다”라고... 아무 문제없다. 배우는 사람 입장에선 여러 시선을 동시에 접하고 나름대로 사유, 판단하여 당시의 하늘색을 짐작하면 되는 것이다.실제로 하늘은 보는 사람의 시간, 장소에 따라 여러가지 색깔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들이 모두입을 모아 “100년전 하늘은 푸르기만 했었다”라고 한다면 그건 문제가 심각해진다. 역사의 양면성(혹은 다면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런 주입교육은 당연히 사유를 방해한다. 역사기록물의 해석을 하나로 통일하여 일방적 내용을 주입하는 건 옳지 못하다, 그만 두어야 한다. 이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다. 유감스럽지만 현재 행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엘리트 중심 교육과 주입식교육은 그렇지 않아도 이미 오래전 유럽에서 그 부작용을 공감하고 폐기물로 처리된 교육법이다. 그 두가지 교육은 지난과거, 편향된 엘리트의식을 소유한 히틀러와 무솔리니 같은괴물을 낳았고 그 휴머니티가 결핍된 교육의 부작용은 엄청난 비극으로 귀착되었다.

히틀러는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주입하기에 열을 올렸고, 나 살기만 급급했던 대중들은 시니컬, 아니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며 일부 광신도들은 좀비처럼파도타기에 몰두했다. 그렇게 삼박자가 들어맞으면서 시작된 이념, 그걸 세상은 파시즘이라 부른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안의 파시즘은 사회 구석구석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가령 국내의 일명 '공익광고("xx해서 xx하니 xx해서 xx하자"는 유형)'는 그 옛날 유럽 파시스트들이 이념을 주입하기위해 즐겨 외치던 구령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유럽 관공서에서 이런 식의 공익광고가 싸그리 사라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반면 우리는 약자와 소수를 배려하지 않았던 과거일제식 교육의 틀을 벗어나 못하여 주입식 공익광고를 여전히 남발하고 있으며, 상식적 토론마저 이념적 논쟁으로 변질시켜 많은 사회적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최근역사교과서를 국가가 나서서 하나로 통일하겠다는 국내소식을 들었다. 근래에 들었던 뉴스 가운데 가장 놀라운 소식이다.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의 마음가짐으로 적합한 마음가짐은?


어느날 도움을 청한다며 내게 내밀었던 조카의 시험지에 나온 이 질문은 주관식 단답형이었다. 답을 요구하지 않는 서술형이면 모를까, 획일화 될 수 없는 문제에 획일화 된 정답을요구하는 이런 시험은 매우 절망적이다. 현시대의 소박한 일을 두고도 이런 단편적인 가르침이 존재하는 마당에 과거의파란만장했던 역사를 두고 주고받게 될 일방적 가르침을 예상하자니 심히 걱정스럽다. 교육을 두고 '백년지대계'라 한 것은 교육의 속성을 제대로 꿰뚫은 명언이다. 우리세대에 교육이 삐뚤어지면 우리 다음의 어느 세대에서라도 반드시 대가를 치루게 돼있다. 사적인 망상이겠는가, 동서고금의 역사가그걸 늘 증명해왔으니 갖는 믿음일 뿐이다.


진리를 고민하던 그 시대, 소크라테스는 진리가 무엇이다 평생 단한번도 정의 내린 적이 없으며 책 한권을 쓴 적도 없다.다만 그는 진리를 떠드는 사람들의 논리의 빈틈을 향해 끊임없이 사유꺼리를 던졌을 뿐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는진리탐구에 목숨까지 버렸지만 타인의 신념을 강요하는 것,심지어 과학으로 종교를 비난하는 것조차 옳지 못하다는 명언을 남기고 죽었다. 무려 기원 전후의 현자들마저 이념의 강제적 통일성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경고하는데 우리는지금 그 반대편에 뚫려진 미개하고 딱딱한 아스팔트로 들어서려 한다. 유럽의 많은 학교들이 치루는 정답이 없는 시험,그건 정답을 내리기 거부하며 끊임없는 사유를 일삼았던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과 다름없다. 소크라테스가인류사의 내노라 하는 현자로 불리어지는 건 괜한 이유가 아닌 것이다.

기록은 남아야 하며 남아있는 기록은 주입이 아닌 사유의 도구로 쓰여져야 한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진화론이든, 사유없는 무작정의 주입은 시대착오적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을 지언정 시대도 변하고 진리의 해석도 변한다. 똑같은 기록 하나를 두고 수많은 계파들이 전쟁을 치뤘고 또 여전히 치루고 있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진리이든 아니든 세상의 모든 기록은 우리에게 끝없는 사유를 요구한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를 지며 그를 보고 울고 있는 여인에게 “너 자신을 위해 울라”고 말했고, 히파티아는 수많은 사람들의 청혼을거부하며 "나는 진리탐구와 결혼했다"고 말했으며, 플라톤은"진리의 소유권이 이땅에선 있을 수 없다"고 말했고, 소크라테스는 함부로 진리를 정의내리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개뿔도 모르고 있는 니 꼬라지나 알라”고 말한 것이다.


얼마전 IS의 테러로 프랑스에서 130여명 이상이 사망했고,그 전날엔 매스컴의 외면 속에 레바논에서 또다른 자살폭탄테러로 43명이 죽었다. 이후 지금까지도 테러사건은 하루가 멀다하고 곳곳에서 벌어진다. 테러범들의 공통점은 한결같다. 사유와 신념의 부정교합체... 사유는 결핍되었고 신념은과잉인 상태, 결국은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무언가를 이룩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의 가치를 부정하게 되는 현상, 그게 도를 넘으면… 죽거나 죽이게 된다. 그것도 죄없는 양민들을...또 얼마전 국내에선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와 노동개혁을요구하는 인파가 10여만명이나 모였다. 불법시위 혹은 복면금지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명제에도 한참 빗나가는 사유없는 형용모순 속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한 농민이물대포를 직격으로 얻어맞아 중태에 빠졌다. 죄없는 양민들을 죽거나 죽이거나… 300명의 아이들이 배안에서 죽어가는걸 멀그머니 쳐다만 보는 이유, 이제 지겨우니 그만 잊으라는 이유, 위안부의 역사를 돈 몇푼 받고 없던 걸로 하자는 이유, 이런 게 다 사유는 없고 사리사욕에 대한 신념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죄없는 사람들의 생명이 걸려있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이 모든 사건들은 결국 다 같은 맥락을 지닌다.


죽는 게 어디 육신 뿐이겠는가, 육신 못지 않게 중요한 건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영혼이다.


여지없다, 기록의 주입이나 이념의 획일화는 인간의 영혼을반드시 죽인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너무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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