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하이데거와 우리의 시대

대선즈음에...

지구촌 인간의 역사가 벌써 몇년이던가. 그동안 수천년을 지속하며 동서양 모두에게 익숙했던 시스템은 왕이나 군주의 명을 따르는 전제정치, 그러니까 계급이 상식이었던 시대였다. 그러다 어느날 불평등한 인간은 말이 안된다며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시작되었다. 그게 이제사 고작 200여년이다. 검증도 제대로 안된 듯한 이 체제는 과연 믿을만한 체제일까? 역사는 돌고 돈다 말하는 현자들의 말대로라면 언젠간 지난 시절의 황제나 독재자가 다시 등장하여 지구촌을 호령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인간사 참 모를 일 맞다. 가령 폼페이는 2천년전 화산폭발로 참혹한 비극을 맞았으나 지금은 그 덕에 고대로마 최고의 유산이 되었으며 그로 인한 많은 관광수입으로 지금의 폼페이를 살찌우고 있다. 이럴 줄 누가 진작에 알았겠는가? 좌절과 희망을 반복하는게 인생이고 세상일이라더니, 지난 날 현자들의 말들은 틀린 거 하나 없다. 박근혜와 최순실 사건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의 사건은 우리에게 한가지 희극을 남겼다. 백성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마음껏 떠드는게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는 인식, 떠드는 것이 곧 주인으로서의 권리라는 인식을 다소나마 저변확대시킨 것이다. 이것도 비극속에서 희극을 만나는 것이고 좌절 속에서 희망을 싹틔우는 일, 현자들은 그렇게 또 의문의 1승을 추가한다.



박근혜를 찍었던 기성세대 백성의 다수는 아버지 박정희의 재래를 원했을 것이다. 간단한 이유, 어설프고 시끄럽기만 한  민주주의보다 똑부러지는 독재가 차라리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밥맥여주지 못하는 민주주의를 택하느니 밥맥여주는 독재를 택했다는 뜻이 된다. 난 그들을 한편 이해한다. 굶주림… 불과 반세기도 못되는 지난 세월엔 허다한 대다수가 굶주렸고 그게 학습의 대부분이었다. 누구라도 나와서 그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런 가난을 해결해주길 원했고 때마침 한반도엔 미국의 동아시아 개발정책을 등에 업은 박정희라는 인물이 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 내가 너희를 밥맥여주겠노라’며, 혹은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라며 부추킨 새마을 운동으로 그는 당시의 백성들에게 플라톤의 철인이 되었고 시이저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많은 백성들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에 관한 허와 실을 묻거나 따지거나 하는 행위를 반역죄처럼 여긴다. 감히 묻건데 그시절 백성들의 판단기준엔 진정 죄가 있는가 없는가? 

이건 유대인 수용소 학살의 주범이었던 아이히만을 두고 한나 아렌트가 “그는 전체주의에 길들여진 충직한 관료였을 뿐, 누구라도 그 자리에선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의 죄는 단지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 바로 뿐이다”라는 말로 설파했던 ‘악의 평범성’ 이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대학 실무 책임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고등교육을 받으며 수많은 사유의 기회 가졌던 사람이지만 박정희 시대의 백성들은 학습의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자면, 그들은 죄없다.  



여튼 반세기가 지났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그 시절 겪었던 굶주림의 고통은 추억이 된 지금의 우리, 세계 최고의 교육열과 학습 속에 사는 지금의 우리는 이제 밥맥여주는 일이 아닌 다른 고상한 일에 빵빵한 가치부여를 하며 살고있는가? 우리가 박정희 세대로부터 뭔가 답답함을 느끼거나 할 말이 많다면 적어도 이 질문으로부터는 명쾌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시절 최고의 화두가 ‘밥’이었다면 지금시절 최고의 화두는 어느 위치에 있는가? 민주주의? 정의?자아실현? 아니면 뷰티풀 라이프?... 정말 그러한가? 나의 아버지가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별로 자신없다. 우리는 겨우 5년전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선택했으며 사회적 강자는 여전히 법적 주도권을 과도하게 누리고 많은 청년들은 꿈과 직업을 잃어 길을 헤맨다. 솔직히 말해보자. 지금 당신과 우리들과 이 사회를 배하는 가장 큰 화두는 무엇인가? 진정으로 '밥'의 문제를 벗어나 있는가? 매일 접하는 전쟁같은 뉴스를 가만히 돌아보노라면 이내 맥빠진 결론에 이르고야 만다. 지난 시절을 지배했던 '밥'이라는 화두는 여전히 이 사회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고 다만 그 소유의 주체가 공동체인 '우리'에서 '나'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시절 ‘밥’은 그저 먹는 밥일 뿐이었지만 지금의 ‘밥’은 먹는 밥을 포함한 모든 ‘기득권’이다. 그 시절은 그저 배만 부르면 배부르다 웃었는데 지금은 배가 불러도 끊임없이 ‘내 밥’을 욕망한다. 절대적 빈곤에서 상대적 빈곤으로의 이동일 뿐이다. 자식 하나를 키우는데 평균 3억이 든다는 지금의 교육 이념조차 여전히 밥의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흡사 실증주의와 합리주의가 맞물려 발전했던 20세기 초의 과학문명이 결과중심의 물질관으로 내달렸던 것과 유사하다. 대량생산을 쫒는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타인의 불행한 삶엔 책임감도 없었고 심지어 나의 존재에 대한 고민도 없었던 시대, 오직 더 빨리 더 많이에만 몰빵한 나머지 내가 누구이며 왜 사는가의 의미를 묻지도 않았던 시대, 마치 지금의 우리의 시대를 보는 듯 하지 않은가 말이다. 오죽하면 그 무렵 현대철학의 거장인 하이데거가 제발 존재의 의미를 의식하며 살라고 경고를 반복했었겠는가?



어쩌면 100여년전의 하이데거가 박정희 시대를 봤어도 역시 같은 말을 했을 것이고 또 지금의 우리시대를 보면서도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큰 지배개념이 ‘밥’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듯 하면서 크게 다르지 않은 세대차,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지금 세대들이 과거를 질책해봐야 별 효과없다. 과거 시대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하면 딱히 할 말도 없어지는데다 과거의 시선으론 지금의 세대들이 ‘내 밥’에만 열을 올릴 뿐, 공동체나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하고있는지 딱히 와닿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아버지가 “느그들은 지금 느그들밖에 모르잖아 이것들아! 우리들은 적어도 공동체의 밥을 위해 살았어 이것들아!” 라고 말한다면 자식으로서의 당신은 무어라 답할 것인가? 어쩌면 이런 세대갈등은 우리들의 상처이고 슬픔이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두세대가 펑펑 울며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조국인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가족사인 것이다. 박정희 시대나 지금이나 살기 힘들고, 결과 중심적이고, 존재의 의미를 소홀히 여기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게 힘든 것이다 시스템을 초월한다는 것은... 초월하여 현자로 산다는 게 어려운 건 그 잘난 하이데거에게도 마찬가지다. 존재의 의미를 그렇게나 고민하라던 그도 결국은 나치주의자였으니 말이다.



허나 지금의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고민하라며 동시에 나치의 편에 섰던 하이데거에게 조금은 당당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끄럽고 경쟁적이며 ‘내 밥’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확실한 독재보다 불확실한 민주주의가 나을 것이라며 한발 한발 진행중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타인이 선택한 평화보다 내가 선택한 소란이 더 의미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겠다 선택했기 때문이다. 집단적이고 철학과 예술과 고뇌가 없는 삶은 곧 동물의 삶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밥이 없어도 좋으니 나의 선택대로 살다가 죽게 놔두라는 뜻이다. 그래서 민주주의(Democracy = demo(민중) + cracy(규율, 권력))라는 단어에는 각종 이념체제에 붙는 ‘-ism’이라는 접미사가 없다. 집단 이념이 아니라 개인의 주체적 선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나의 정체성, 나의 주체성, 나의 달란트를 중요시 한다는 건 결과(밥)보다 과정(非밥)중심이라는 뜻도 된다. 얼핏 명분이 뻔지르르한 것 같지만 결과가 항상 좋은 것만도 아니다. 가령 민주주의의를 그렇게 외치던 소크라테스가 오히려 아테네의 민주주의 때문에 희생당했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앞으로도 불완전할 것이다. 다만 히틀러의 탄생과 같은 최악이라는 시나리오는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뿐이다. 플라톤은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며 민주주의의 불완전함을 실감했고 철인의 통치를 원했었다. 그 스승과 제자가 저 하늘에서 미래의 히틀러를 보았다면 뭐라 대화를 나눴을까? “스승님, 제가 눈이 어두웠습니다. 철인으로 보이던 자도 나중엔 부패하여 국가를 최악으로 이끌 수 있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다수의 백성이 원하는 길이 최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일찌감치 깨달으신 스승님은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겨우 30년, 수천년 이어온 역사 속에 내나라의 대표를 내 손으로 뽑기 시작한지 30년이다. 내가 원했던 인물이든 아니든 모든 게 공동체의 운명이다. 그게 민주주의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이끄는 세상은 혁명이 아닌 이상 변화가 더디다. 도시의 형태는 빠르게 변할지언정 백성의 지배개념은 굶주리던 시절의 인사법인 “식사하셨습니까?”를 지금껏 반복하는 것만큼 변화가 더디다. 또다른 아이히으로 살지 않으려면, 혹은 하이데거처럼 실천적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제대로 된 학습으로 꾸준히 사유하며 살아야 한다. 세상일이 아무리 돌고 돈다 한들 오늘의 사건은 분명 거름이거나 독이 되어 희비극을 앞당기거나 더디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문학 과잉시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