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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부라 게이트(SUBURRA)

이탈리아는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

문제 :
다음은 오늘날의 이탈리아를 구성하는 많은 조직들 중 서로 관계가 있는 조직들끼리 묶은 것이다. 잘못 묶은 것은?

1. 교황청 - 정치인
2. 정치인 - 마피아
3. 마피아 - 집시
4. 교황청 - 집시
5. 교황청 - 마피아
6. 정치인 - 집시

이런 유형의 문제를 두고 답이 뭔지를 골똘히 생각해 보는 건 어쩌면 부질없는 짓이다. 생을 살다 철이 들 때쯤 되면 누구나 직감한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걸, 애증의 샴쌍동이라는 걸, 그리고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조직은 인간의 마음만큼이나 복잡한 유기체라는 걸... 하여 6개의 보기 가운데 잘못 묶은 건 없을 것 같다. 부정하고 싶거나 외면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허나 눈을 감는 건 사적인 위안이 될 뿐 공동체의 구원으로 가는 길은 못된다. 언급하기에도 진부하지만 예수와 지금의 교황 프란체스코가 내내 역설했던 것도 나 홀로 평안한 외면이 아닌 모두를 위한 몸던지는 실천이잖은가.

영화는 십자가 앞에 무릎꿇은 전임교황 라칭거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기도하던 라칭거가 비서를 불러 심상찮은 이야기를 건내자 비서는 적잖이 당혹해 한다. 장면은 컷되고 화면엔 문장 하나가 떡 하니 뜬다.

‘2011년 11월 5일, 파멸 7일 전’. 시작부터 뭔가 의미심장하다. 이후 나오는 장면들은 두시간 내내 소위 악으로 규정지을 만한 것들이다. 국회의 저열한 논쟁, 의원의 미성년자 성매매, 마피아의 살인과 기생하는 집시들… 두시간동안 계속되는 스토리의 축은 서두에 예문으로 언급했던 4개의 조직이 오스티아 지역 재개 이권을 놓고 벌이는 7일간의 암투다. 이 영화가 세간에 집중을 받았던 이유는 원작매체가 창조된 이야기가 아닌, 사실을 기반으로 한 다큐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시내 대형서점에 가면 영화와 같은 제목의 530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원작을 볼 수 있고 1억명이 넘는 회원을 가졌다는 지구촌 최대 인터넷 엔터테인먼트 서비스 기업 ‘넷플릭스’가 10부작 드라마로 제작을 확정(이탈리아산 최초), 이미 판매중이다. 국내에 기대만큼 알려지지 않은 건 정히 유감이지만 영화로서도 각종 영화제에서 11개부문 후보와 4개부문을 수상하므로서 이미 국제적으로 인지도를 넓힌 바 있다.

사실에 기반을 둔 영화라니 도대체 어떤 사실을 기반으로 했다는 걸까? 그 의미심장하던 문장, ‘2011년 11월 5일, 파멸 7일전’이 결정적인 힌트다. 날짜를 계산해보면 파멸의 날은 곧 11월 12일이라는 말이 되는데 그날은 정확히 당시 총리였던 베를루스코니의 사임일이다. 영화는 그의 사임을 ‘파멸’이라 표현한 것이다. 영화가 거의 끝날 무렵, 그러니까 마지막 7일째의 장면 중엔 부패한 여당의원(주인공)이 베를루스코니와 긴급한 전화통화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베를루스코니가 이탈리아 정치 부패의 대표적 인물이라는 건 이미 저 달나라까지 알려진 사실이므로 영화가 만일 그에게 촛점을 맞춰 진행됐다면 무지 뻔한 영화가 됐을 것이다. 허나 영화가 정작 ‘까’고 싶어하는 건 단순히 한 인물이 아닌 오래된 부패 커넥션이다(비슷한 한국영화 중에 ‘내부자들’ 정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또 한가지 주목을 끄는 장면은 마피아의 우두머리(극중 명 사무라이)가 한 추기경을 만나 자금지원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추기경은 “액수도 너무 크고 당면한 더 큰 문제(영화 시작에 암시된 라칭거의 거취)가 있어서 지금은 안된다”고 하자 사무라이는 “그렇다고 제가 추기경님을 강바닥에 쳐넣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냐”며 협박한다. 그러자 추기경은 “그렇다면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내 몫을 더 챙겨달라” 요구한다. 원작이 건드린 이 두가지 장면뿐 아니라 두시간 내내 나오는 복잡하게 얽힌 커넥션의 나열은 이미 이탈리아에 만연된 전혀 놀랍지 않은 뜨거운 식어버린 감자들이다. 가령 몇년 전 있었던 일부 교황청 추기경들의 부정부패 사건은 후에 라칭거의 입으로도 내비쳐진 바 있다. 사임 의사표명 이틀 후 수요일 미사를 집전하면서 ‘교회의 얼굴을 더럽히는 분열’을 언급했으며 교황청 내부의 부패와 암투가 적힌 문서(일명 바티리스크)가 유출되자 3명의 추기경에게 진상조사를 지시하여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비밀보고서를 받았다는 사실도 이미 세간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 비밀보고서 이후 두달이 채 못되서 라칭거는 예정대로 사임한다. 이 영화는 그러니까, 정치인, 마피아, 집시 뿐만 아니라 베를루스코니와 교황청까지 대놓고 ‘까’는 영화다.


과거 어느 시절이라도 권력층의 부패를 이정도로 대놓고 깠다면 동양이든 서양이든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랜 역사동안 권력이 없는 서민들은 어두운 밀실에서 누가 들을까 염려하여 숨어서 재잘거리며 낄낄거리는게 전부였다. 권력층이든 서민층이든 진보하지 못한 체제 내에선 밀실에서 많은 것들을 이루어 내고 진보한 체제 내에선 열린 공간에서 많은 것들을 이루어낸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어쩌면 밀실과 열린 공간의 투쟁역사다. 우리는 말과 글 모두 디지털화 되어 전세계가 ‘1일 생활권’을 뛰어넘는 ‘실시간 생활권’이 된 시대를 살지만 지구촌이 이렇게 통째로 입체적 공간(이른바 소셜 네트워크)이 된 건 지극히 최근이며 반면 밀실의 역사는 실로 오랜 것이다.

영화제목인 ‘Suburra’의 의미를 좀 찾아보니 ‘고대 로마시절 도시의 하부(sub-urbe)에 위치한 불쌍한 계층들의 밀집 지역’을 뜻하는데 위치는 트라이아노 황제 목욕장, 혹은 Colle oppio 뒷편이었고 지금은 지하철 B선인 Cavour역이 있는 구역을 말한다(그곳을 잘 둘러보면 여기저기 Suburra라는 글자들이 보인다). 그런데 하부에 위치한 불쌍한 계층들 지역이란 게 무슨 의미일까? 언뜻 생각하면 빈민굴이나 전염병 환자들의 격리수용소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전적 의미는 아주 완곡하게 껍데기만 표현한 것이고 좀 더 살갑게 말하자면 향락을 제공하는 대가로 부패가 거래되는 지역을 뜻한다. 막말로 말하면 근현대 한국사의 밀실정치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장소, 다름아닌 요정, 혹은 룸살롱이다(헐~ Cavour역 주변이 고대 로마 룸살롱 지역이었다니). 고대에 수부라가 있었다는 건 많은 결정들이 보이지 않는 곳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뜻일 게다. 주권이 백성에게 없었다는 얘기다. 제국의 역사 이전부터 수백년 공화정을 했다는 의미가 곧 모든 계층이 평등한 위치에서 자유로운 발언을 했다는 의미라거나 혹은 그 발언들이 곧이 곧대로 수렴되어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라고 믿는 건 바보같은 짓이다. 그렇다면 계급이 없어지고 가상공간의 자유가 허락된 지금, 밀실이 아닌 열린 공간을 사는 지금의 백성들은 권력의 수부라를 향해 얼마나 뻑큐를 날리고 있을까? 아니, 소셜 네트워크는 수부라의 파멸을 과연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일까?


수부라의 파멸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만이라도 보여준 한 인물이 의외지만 이탈리아에 있다. 그 사람 이야기를 잠시 언급해보려 한다. 먼저 그의 인생역정을 대충 나열해 본다면…


1948년 출생

1977년 코미디언 데뷔

1986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TV쇼 진행

1987년 쇼에서 총리 비판으로 퇴출, 이후 연 100회 이상의 오프라인 쇼 진행

2005년 블로그 개설, 이후 전국 650여개의 지역 오프라인 모임(Meetup) 결성

2007년 볼로냐에서 Meetup 총 모임(V-Day) 주최, 200여만명 집결(ㅎㄷㄷ)

2008년 가디언 집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블로그 9위 선정

2009년 5성운동(Movimento 5 stelle) 결성

2013년 총선에서 상하원 합계 163석 획득, 제 2 야당으로 약진, 이후 현재까지 로마를 비롯, 전국 45개 도시 시장 배출. 집권 민주당을 제치고 여론조사 지지율 1위.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2007년 볼로냐 집회 때 200여만명이 집결했다는 것인데 이 정도면 우리의 촛불집회에 맞먹는 규모다. 당시 집회의 명칭은 ‘V-Day’, 여기서 ‘V’는 단순히 승리의 상징이기 이전에 ‘Va fancullo!(좆까!)’의 약자였으며 집회현장엔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부패한 정부를 역대급으로 대놓고 아작내는 영화)’를 패러디한 수많은 이미지들이 함께 집결하였다. 영화 한편의 이미지와 메세지가 현실정치에 그대로 투영, 재생산되어 영화 이상의 결실을 맺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영화가 현실이 되는…

이탈리아인들의 전국적 분노게이지가 이정도였다면 기성 정치인들의 부정부패가 인내심의 한계점에 도달했었다는 얘기다. 베를루스코니 이후 이탈리아는 10년 동안 GDP 성장률이 오히려 마이너스를 기록했으며 국가부채마저 전세계 탑클래스 대열로 올라섰다. 또 한국사회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생겨난 것처럼 이탈리아에서도 ‘1000유로 세대’라는 말이 생겨났다. 지난 한국사회와 닮아도 참 많이도 닮아있다.

난세엔 꼭 영웅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수십년째 이어지는 지긋지긋한 이념다툼과 수부라 정치가 너무 싫었던 이 코미디언은 5성운동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든 소통과 의사결정 과정이 철저히 소셜 네트워크의 플랫폼 내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으며 결국 진짜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유럽에서 가장 나이많고 부패했던 의회를 가장 젊은 의회로 바꾸어 놓았다(오성 출신 국회의원 163명의 평균연령이 겨우 37세 ㅎㄷㄷ). 이 믿기지 않는 변화를 이끌어 온 코미디언의 이름은 잘 알려진대로 베페 그릴로(Beppe Grillo)다.

Beppe Grillo

이 대단한 변화의 성과는 비단 이탈리아만의 것이 아니다. 30년 넘게 이어진 스페인의 양당체제를 무너뜨리고 경쟁력을 갖춘 제 3당으로 우뚝 선 ‘포데모스(Podemos)’도 소셜 네트워크로 새로운 역사를 쓴 케이스에 해당한다. 게다가 이 당의 대표는 이미 70세가 다 된 베페 그릴로와는 달리 나이가 이제 겨우 40이다.

이처럼 최근 유럽 곳곳엔 새파랗게 젊은 정치인들의 등장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자니 이건 필연이다. 어릴 적부터 sns의 환경에서 자란 세대들이 이제 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나이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동시에 수부라에서 활동하던 기성세대들이 변방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동시에 비밀이 줄어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밀이 줄어들면 이념적 허상보다 현실에 당면한 생활밀착형 정책들에 관한 논쟁이 많아진다. 5성운동이나 포데모스와 마찬가지로 다혈질 트럼프가 클린턴을 상대로 의외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로마노 프로디나 마테오 렌치가 총리로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도 관념적 언어로 뻔한 레파토리를 떠드는 게 아닌 좀 더 현실적인 정책들로 구체적 비전을 어필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셜 네트워크 정치인들(혹은 백성들)이 앞으로 얼마나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갈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분명한 건 양지를 지향하는 온라인 시스템이 음지를 지향하던 수부라 시스템을 이겨내고 있고 권력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Berlusconi

듣자하니 베를루스코니가 올해 총선을 앞두고 복귀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들 한다. 이미 작년에 우파연합의 지방선거 승리에 킹메이커 역할을 하며 그 힘을 증명시켰으니 워밍업은 끝난 상태다. 게다가 상대를 아예 민주당이 아닌 오성운동으로 콕 집어 도전장을 내밀었다. 민주당이 이기든 오성운동이 이기든, 아니면 진짜로 베를루스코니가 이기든 내 알 바 아니지만 과연 수부라의 부활(혹은 파멸)이 성공하게 될 지를 지켜보는 것도 분명 재밌는 구경이 될 것 같다. 아 그리고, 수백만의 대규모 집회 → 파멸 → 권력이동… 최근 이탈리아가 밟은 이 길을 우리도 불과 몇년 차이로 뒤따라 가고 있다는 것도 아주 재밌는 구경거리다. 이런 추세라면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미디어 스타가 신당의 주체로 등장할런지도 모르겠다. 소셜 네트워크를 포함한 모든 미디어의 순기능은 어쩌면 이런 것이다. 먼 훗날, 오랫동안 바보상자라는 오명을 내내 뒤집어 썼던 '티비'라는 요물단지가 수부라를 파멸시킨 반전드라마의 주인공이 됐다는 소리마저 들렸으면 좋겠다.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 천지다. 숨어살기 바빴던 과거의 광대가 세상을 바꾸려 최전선에 서있는 시대를 보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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