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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교황 (The two Popes)

대립이 화해로 변화하는 과정

나는 옳은가?


나라고 별 수 있나, 사람에 대한 호불호에 감정이 먼저 개입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누군가 내게 라칭거가 좋으냐 프란치스코가 더 좋으냐 묻는다면 나는 프란치스코라 답할 것이다. 또 그 이유를 묻는다면 열거할 대답에 아마도 ‘진보’라는 단어를 꼭 넣게 될 듯 하다. 그러나 그것이 친구와의 단순한 수다거리가 아니라 공적인 토론자리에서 던져진 진지한 질문이라면? 정말로 프란치스코는 진보적이고 라칭거는 보수적이냐 묻는다면? 어쩌면 대답을 주저할 것이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를 더 좋아한다는 나의 감정은 다분히 자기기만적이다. 프란치스코는 과연 진보적인가 하는 질문도 쉽지 않지만 심지어 라칭거보다 진보적인가 하는 질문도 역시 쉽지 않다. 진보나 보수의 개념이 광활한 스펙트럼을 품고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복잡한 사람의 인생을 단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는 것, 그것 역시 쉬이 못할 짓이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권력층들을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살다보면 마주치게 되는 퍽도 다양한 이념의 소유자들... 시쳇말로 '잘 모르는 사람과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서로 섞지 말라'는 충고는 이념에 가치를 매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반증하는 오래된 고언이다. 하지만 살다보면 꼭 직면하게 된다, 정치적 이념이 다른 자와의 대화 말이다. 당신은 그걸 얼마나 능숙하게 잘 해내는가?



일단 알고 볼 일


흔히들 그런다. 라칭거는 보수, 프란치스코는 진보. 영화는 그 둘의 인생을 죄다 설명하진 않지만 중요한 과거사들을 간간이 암시하거나 때로는 아주 적나라하게 끄집어낸다. 주안점은 크게 두가지. 하나는 프란치스코의 과거 스토리, 또 하나는 두 교황의 대립되는 성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화장면이다. 여기서 의외인 것은 라칭거의 과거는 거의 나오질 않고 주로 프란치스코의 과거에 집중조명돼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생각하면, 세상의 일부로부터 '나치 교황'으로 불려졌던 라칭거의 과거를 두고 할 말이 더 많을 듯 하지만 영화는 아주 많은 시간을 프란치스코의 과거에 할애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건 아주 노골적 힌트나 다름없다. 라칭거의 과거에는 그닥 놀라울 것 없지만 프란치스코의 과거에는 의외로 복잡한 사연이 있다는 힌트 말이다. 이쯤되면 감독인 메이렐레스가 영화를 통해 던지고 싶었던 메세지를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진보적 성향으로 알려진 프란치스코의 과거는 다소 의외의 스토리가 있다. 둘째, 상반되는 가치관을 가진 두 교황은 어떻게 동시대의 난관을 넘고있는가? 최소 이 두가지에 약간의 관심만 있어도 영화는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그 비밀스러운 콘클라베 장면으로 막을 연다. 잘 알려진대로 교황을 뽑는 투표장면은 비공개로 진행된다. 영화는 그 진행과정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재현하는데 실제의 콘클라베를 얼마나 정확히 구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꽤나 눈이 즐겁다. 물론 이 투표과정을 서두에 집어넣은 것은 라칭거의 정치적 성향과 교황청 내에서의 그의 입지를 알리기 위한 영화적 장치다. 라칭거의 당선으로 콘클라베가 종결되자마자 영화는 시간적 배경을 7년 후인 2012년으로 서둘러 옮긴다. 이 시간적 배경의 이동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라칭거 인생의 최대 위기를 던져준 사건, 그 유명한 '바티리크스' 사건이 터진 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듬해에 라칭거는 교황직을 스스로 내려놓는다. 교황사 이래 700여년만의 '자진' 중도사임이라는 결정을 하도록 만든 '바티리크스'의 위력, 그 위력은 이미 세상에 공개되어 웹검색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영화는 라칭거 인생의 최대 고비였던 바로 그 1년을 다루고 있다. 그가 그 1년동안 어떤 고민을 얼마만큼 했으며 프란치스코와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또 그 둘의 대화가 어떻게 프란치스코의 후임으로 이어졌는지를 아주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이 영화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두 교황의 대화장면이다. 영화의 절반을 이 대화로 채웠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초반의 대화는 보수와 진보로 상징되는 가치관의 대립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고 후반의 대화는 대립되던 두 교황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며 포용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가 중요하다. 대립이 포용으로 전환되는 과정 말이다. 이게 영 어색하거나 설득력이 떨어지면 소위 B급영화로 전락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 난관을 프란치스코의 과거사로 해결한다. 지금의 진보적 성향이 있기까지 그의 가슴에 남아있던 커다란 주홍글씨, 혹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을 들추어낸다, 그것도 영화의 절반에 가까운 아주 긴 시간을 할애하여. 한 사람의 과거에 대한 고백과 고해성사가 어떻게 두 사람을 화해하게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영화가 B급영화로 전락하지 않는지, 궁금한 자 영화를 직접 보시라.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라칭거가 처음부터 보수적인 건 아니었다. '나치 교황'이라는 오해를 받았던 이유는 그가 14살때 '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했던 전력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그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으며 그의 아버지도 나치즘의 열혈 반대자였었다. 신학대 교수 시절에도 교황청 관료들을 비판하는 발언들을 거침없이 했던 그는 어쩌면 진보의 대명사로 생을 지속할 수 있었으나 보수적 인물로 변화될 수 밖에 없었던 건 그만한 계기가 있었다. 1967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40세때 네오마르크시즘 열풍이 있었고 당시 극렬좌파 학생들의 기독교에 대한 격렬한 반대운동과 마주치면서 진보에 대한 위험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반면 프란치스코는 비슷한 시기인 1970년대, 아르헨티나를 장악하고 있던 군사독재에 협력했던 전력이 있다(물론 이 문제에 관해선 논란이 많다, 주변인들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처신이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 사건은 후에 프란치스코의 가슴에 씻기지 않는 죄책감으로 못이 박힌다(개인적 뇌피셜이지만 그의 진보적 성향이 어쩌면 그 죄책감을 씻으려 하는 일종의 심리적 기제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세월이 40여년이 더 지나고, 보수와 진보라는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라칭거와 프란치스코는 교황청이라는 한 지붕에서 '바티리크스'라는 충격과 동시에 마주서게 된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교황이라는 지위에서 지구촌이 아닌 교황청 내부만의 각종 스캔들을 안고 가는 것도 매우 박찬 일이다. 그 두 교황은 결국 서로의 아픔과 무거운 짐을 서로 이해하고 화해한다. 영화는 2시간의 런닝타임으로 그 과정을 잔잔히 그려내고 있다.



보고나서,

- 사람의 가치관은 각자 겪어본 환경을 기반으로 형성된다(그걸 초월한 가치관을 갖는다면 참 대단한 사람이다).
- 한번 형성된 가치관은 변화되기 쉽지 않으커다란 난관의 경험은 타인의 가치관을 이해하는데 계기가 될 수 있다.
-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두시간 내내 루하지가 않았다.

- 영화가 무거워질까봐 집어넣은 가벼운 대중음악들이 의외로 의미심장하다

- 월드컵 축구 장면을 넣은 건 신의 한 수.
- 영화의 온라인 개봉(넷플릭스)은 작품성으로 그 논란을 종식시켜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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