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에서 온 편지
로마야, 오늘 밤은 장난치지 마! 내가 그녀에게 ‘네’라고 응답할 수 있도록 나 좀 도와줘.
네가 지니고 있는 더 빛나는 모든 별을 골라봐.
-이탈리아 가요 ‘Roma nun fa` la stupida stasera’ 중에.
예린아. 내가 초등학교 소풍 가기 전날 밤 이후로, 날씨를 걱정했던 일이 있었나 싶다. 마리우챠 할머니의 고향으로 소풍 가는 날 아침. 뭔가 허전해서 둘러봤더니 글쎄 소풍에 김밥이 빠졌지 뭐니. 서둘러 두 장의 한국 김에다 그 아침에 단무지 대신 절인 생강 조각을 넣고는, 달걀과 독일 소시지를 얇게 썰어 단단히 말았어. 밀라노 나라의 김밥이랄까. 물론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과자도 미리 사 두었지. 이제는 출발! 다행히도 아침 8시 25분 발 열차는 밀라노 남쪽으로 30분간 달려 도시 파비아 Pavia에 나를 데려다준다. 유서 깊은 도시 파비아는, 철학자 보에티우스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유해를 품고 있는 ‘황금 하늘의 성 베드로 성당’ Basilica di San Pietro in Ciel d'Oro과 이탈리아에서 9번째로 높은 천장의 돔을 가진 두오모 성당이 유명하다고 들었어.
전설에 따르면, 파비아에 도착한 초기 부족민들은, 어디에 자신들의 짐을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대. 그래서 그들이 믿는 신에게 묻기로 했지. 배를 강 한가운데로 댄 후, 비둘기를 가진 소녀에게 부탁하여 하늘로 날리게 했어. 새는 강 위를 빙빙 돌았고, 소녀는 강 왼편에 둥지를 짓는 비둘기를 향해 손짓했단다. 이것을 신의 표지로 생각한 부족들은 그곳에 도시 파비아의 첫 번째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
린아. 파비아 터미널에서 출발한 95번 시외버스는 외곽도로를 타기 전에, 잠시 코페르또 다리 Il Ponte Coperto 옆에 선다. 그 순간 차창 너머로 도시를 가로지르는 티치노 강의 전설이 들리는 듯했어. 그날은 999년 12월 24일 밤이었대. 티치노 강을 건너 성탄 전야 미사를 가려던 사람들은 배 앞에서 실망할 수밖에 없었어. 왜냐면 티치노 강은 밤안개로 자욱했고, 미사는 곧 시작될 예정이었거든. 이때 무리 중에 붉은 옷을 입은 낯선 이가 말했지. “ 지금 여기에 튼튼한 다리를 세워줄 테니, 첫 번째로 건너는 영혼을 나에게 주시오! ” 그래 맞아! 그는 악마였어. 악한 영은 언제나 인간의 약점으로 유혹했단다.
어느새 25분쯤 달린 시외버스는, 포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를 지나 첫 번째 정류장에 먼지를 피우며 멈춘다. 지평선이 보이는 들판에 한바탕 바람이 불고 나면, 물결치는 보리밭 무리. 시골은 한국이나 이탈리아나 소박한 마음을 품게 하나보다. 한가로이 지나는 자동차들이 여유롭게 보이는 강가 마을 메 자니노 Mezzanino에 도착한 건, 걸어서 40분이 지난 후였어. 원래 시골이라고 하면, 잠자리나 나비가 제법 보일 텐데 여기는 그보다 귀여운 도마뱀들이 더 많은 거 같더라.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오랜만에 동네에 사는 개들이 밥값을 하느라, 한국에서 온 나그네를 얼마나 사납게 환영해대는지 민망할 정도였지. 거기에 대고 뭘 안다고 한국말로 ‘조용히 좀 해라~창피하다!’라고 했으니 참 우습다. 그치?
다시 티치노 강의 전설로 가볼까. 악마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술렁거렸어. 그때 인근 도시를 보호하던 미카엘 대천사가 나타나 지혜를 줬단다. 마침 다리는 순식간에 완성되었고 악마는 다리 건너편에서 첫 번째 영혼을 기다리고 있었지. 하지만 그가 거친 안개를 뚫고 만난 첫 번째 영혼은, 다름 아닌 사람이 아니라 염소였어. 그제야 속았다는 사실을 안 악마는 거센 폭풍을 일으켜 다리를 무너뜨리려 했지만 소용없었지. 사람들은 이날을 감사하며 다리 중간에 작은 성당을 세워 기념했다는 오래된 전설.
예린아. 아흔이 넘은 연세에도 이탈리아어를 가르쳐 주시던 마리우챠 할머니는, 나와 함께 소풍을 가기로 한 날 아침. 준비하시다 방에서 미끄러지신 후 회복하지 못하시고 고향으로 가시게 됐어. 할머니가 ‘하느님 곁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건, 내가 스페인 산티아고를 걷는 중이었어. 순례를 함께하던 친구 다니엘 퀸타나도 그날은 말이 없던 나를 조용히 바라만 보았지.
드디어 마을 외곽에 자리 잡은 할머니의 작은 묘가 보인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이태리 과자를 앞에 놓고 나는 기도를 해 드리고 싶었어. 전쟁고아들을 보살피며 평생 동정녀로 살았던 사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을 누구보다 더 사랑한 신자. 아침마다 정장에 구두로 몸가짐을 하고 산책을 할 때면, 가난한 이들에게 대화와 자선을 아끼지 않던 여인. 고집을 부리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어 가끔 나를 당황스럽게 했지만 금세 아기처럼 장난치며 웃을 줄 알던 할머니였어.
" 과거는 지난 것이고, 미래는 아직 모르는 것이니,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소중해. " 그때 나는 물었어. " 할머니,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과거에 영향을 받고 내일을 걱정하며 살잖아요. 저도 그렇고요. " " 맞아. 그렇지! 하지만 ‘과거’에게 차오 Ciao 하며 작별을 고하고,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만 해! 오지도 않을 내일 걱정에 매이지 말고 말이야…”
정오를 알리는 메자니노 성당의 종소리가 공동묘지에 퍼진다. 생을 이어가기 위한 산 자들의 식사시간. 예린아. 발길을 돌리기 전에 할머니의 묘 앞에서 예전에 좋아하시던 ‘로마야, 오늘 밤엔 장난치지 마!’라는 노래를 불러 드렸어. 사람들은 이 노래에 행복해하시는 할머니를 보고, '젊을 때 로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저러실까 수상하다며~’ 할머니를 웃기곤 했지.
다시 도시 파비아로 돌아와 둘러본 오후의 티치노 강변에는, 슬픈 기억도 붉은 옷 사나이의 분노도 이제는 사라지고… 어린 소녀인 마리우챠 할머니가 어딘가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을 것만 같은 티치노 강 저편. 오늘도 악마가 세워준 다리에는 젊은이들의 햇살 가득한 사랑 노래가 강물 따라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