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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Jul 03. 2022

집처럼 푹 쉬세요, 주의사항 20개는 명심하고요

장대비 퍼붓던 밤, 숙소의 본질을 생각하다

“휴지를 낭비하지 마세요”

“고기 굽기 금지”

“옷걸이에 옷을 너무 많이 걸지 마세요”

“변기 막히면 직접 뚫으세요”


최근 강원도 모처에서 묵은 숙소에는 이 같은 금지사항, 주의사항이 유독 많았다. 출입문, 싱크대, 책장, 옷걸이, 심지어 변기 앞까지. 말 그대로 눈 닿는 곳마다 붙어 있었다. 세보진 않았는데 20개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공유 숙박 사이트에서 인기인 '감성' 숙소와는 퍽 어울리지 않는 '강성' 문구들이었다. 혹시 CCTV가 걸려 있는 건 아닌지, 물건 하나 잘못 건드렸다가 혼쭐나고 쫓겨나는 건 아닌지 마음이 불편했다. 숙박시설에 체크인했다기보다는 어딘가 입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번에 묵은 숙소와 전혀 상관 없는 unsplash 사이트 이미지.

산간벽지로 출장을 갈 때가 많다. 적당한 거리에 적절한 가격의 호텔이 있으면 가겠지만, 호텔이 있다면 산간벽지가 아니겠지. 그래서 에어비앤비를 찾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모텔을 간다. 이번 출장지 주변에는 숙소가 아예 없었다. 그래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를 잡았다. 작은 오두막이었다. 아내가 말했다. “와, 거기 엄청 핫한 곳인데 빈방이 나왔어? 좋겠다. 좀 부럽네.”


아내가 그렇게 말하니 출장이긴 해도 내심 기대했다. 한데 체크인하는 순간 느낌이 싸했다. 장대비가 퍼붓는 오후 5시, 가파른 산길 한편에 차를 대고 숙소 앱에서 안내문을 살폈는데 도무지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비슷하게 생긴 건물이 있어서 들어갔더니 다른 집이었다. 호스트에게 전화했다. “안내문을 봐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찾아가죠?” 빗발이 더 굵어졌다. 지금 자리에서 몇 걸음 내려가서 왼쪽 방향의 좁은 길을 보라고 설명했지만 그래도 찾기 어려웠다. 그랬더니 “다른 손님은 다들 잘 찾으시던데”라고 짜증 섞인 투로 호스트가 말했다.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지금 비가 얼마나 많이 오는데요. 그리고 잡초가 많아서 이정표도 안 보입니다.” 떨떠름한 기분을 담아서 말을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 조금 더 헤매다가 오두막을 발견했다. 후줄근하게 젖은 채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호스트와의 통화로 얼마 전 일이 기억났다. 심하게 까불던 5살짜리 지인 아들에게 “야, 어른들 이야기하게 조용히 좀 해라. 네 누나를 봐. 얌전히 잘 놀잖아”라고 말한 적 있다. 그때 지인(애 엄마)이 말했다. “그런 식으로 비교하면서 훈계하는 게 애들한테 제일 안 좋대.” “흠, 나도 아는데 너무 까부니까..”

다른 손님은 다들 잘 찾아가는 숙소의  호스트에게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지인의 말 뜻을 알 것 같았다. 별것도 아닌 일로 훈계를 당한 어린이가 된 기분이었다.


역시나 내가 묵은 숙소와 전혀 상관 없는 이미지. unsplash에서 퍼옴.

그날 밤, 행동거지를 각별히 조심했다. 주의사항을 철저히 준수했다. 휴지를 아껴 썼고, 옷걸이에 무거운 옷도 걸지 않았다. 호스트가 아끼는 소품들을 조심조심 이용했다. 체크인할 때는 잔뜩 예민한 상태였지만 내내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다. 퍼붓는 빗소리와 빈티지 오디오에서 나오는 노랫소리가 근사한 하모니를 이뤄 제법 운치 있는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소리로 치유받는 밤이었다.


한편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얼마나 무례한 손님이 많으면 저렇게 많은 주의사항을 온 사방에 붙여뒀을까. 좁은 오두막 실내에서 기름기가 온 사방에 튀는 삼겹살을 굽고, 휴지를 몇 두루마리씩 탕진하고, 호스트가 애써 모은 소품을 슬쩍 가져가고, 변기가 막혀서 넘치도록 음…그만. 어쨌거나 호스트의 공간을 공유하는 숙소가 됐든 고급 호텔이 됐든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진상 혹은 빌런은 숙박업이 지구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 나타날 테다. ‘내 돈 냈으니 내 맘대로’ ‘손님이 왕’ 정신이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요즘 많이 쓰는 '내돈내산'이라는 말이 불편하다. 네 돈 주고 산 거 아니면 입 다물어, 빌려 쓰거나 협찬받은 주제에 어디서 자랑질이야 같은 말이 그 뒷면에 있는 것 같아서다.  


이튿날 숙소를 나서며 여느 때보다 단속을 철저히 했다. 설거지를 깨끗이 하고 쓰레기도 철저히 분리해서 내놓았다. 다행히 변기 상태도 문제 없었다.


출장지로 차를 몰고 가면서 생각했다. 내가 이런 숙소를 운영한다면 과연 어떤 식으로 할까. 세계 각지서 온갖 숙소를 이용해보며 숙박업에 대한 나름의 관점과 철학이 있다고 떠들곤 했다. 환대와 위생, 집 같은 편안함이 기본이고 인테리어나 멋 같은 건 그다음이라고. 그것도 한가한 소리일지 모른다. 나도 '한 예민, 한 까칠' 하는 사람인지라 온갖 종류의 진상 손님을 상대하다 보면 숙소 전체를 주의사항으로 도배할지도 모른다. “손님 제발 얌전히, 없는 듯 머물다 가주세요”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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