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격월간 <민들레 145호> 1-2월호(2023년 1월 20일 발간)에 실렸던 글입니다.
나는 ‘보는 것’, 또는 ‘본다는 행위 그 자체’에 관심이 많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의 80%를 시각을 통해 받아들인다고 하지 않는가. 더구나 미술은 ‘보이는 것’을 다루는 과목이니 미술교사로서 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신비한 현상이다. 그것은 ‘눈’이라는 신체기관을 이해하는 것 너머에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눈으로 눈앞의 풍경을 보고 사람을 보고 사물을 본다. 하지만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함께 있었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눈으로 대상을 보지만 무엇을 볼 것인지는 마음이 결정한다.
우리는 늘 관심이 있는 것,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것을 먼저 선택해서 본다. 그리기에 관심이 있는 학생은 미술 수업을 좋아하고, 평소에도 온갖 곳에 낙서를 한다. 누구든 마음이 가는 특별한 대상이 생기면 마치 마인드맵을 그리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과 관심이 발전해 간다. 이런 관심은 우리를 덕후의 세계로 이끌기도 한다.
때로 전혀 관심이 없던 것에 눈길을 돌릴 때가 있다.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을 맞닥뜨릴 때나 주변으로부터 특별히 그 상황을 주시할 것을 요구받을 때가 그렇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평소 관심이 없었던 것들에도 눈길을 주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상황이 중요한 것은 이로부터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감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익숙하게 해 오던 것이 아닌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는 것. 그것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새로운 생각의 문을 열어준다. 미술교육의 역할은 이 지점에 있는 것 같다. 보는 방식에 돌을 던지는 것. 익숙하게 생각하고 당연하다고 봐왔던 것을 의심하고 새롭게 보는 것. 미묘한 변화를 포착하는 것.
3인 3색 인물 드로잉
A는 장차 일러스트 작가가 꿈이다. A가 그림을 그리면 모두가 감탄한다. “우와, 잘 그렸다. 선생님, 대단하지 않아요?” A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기분을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으쓱하는 표정을 지울 수 없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들은 일찌감치 소질을 인정받아 미술학원에 발을 들여놓기 마련인데, A의 그림 또한 미술학원의 영향이 어른거린다. 기본 선을 긋고, 형태를 여러 개의 면으로 나누어 명암의 흐름을 정리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빗금을 그어 어두운 부분을 마무리한다. A는 친구 모습에서 실제로 ‘그것들’을 보았을까? 아마도 A는 미술학원에서 배운 방법대로 모델을 관찰했을 것이고, 배운 대로 선을 긋고 명암을 칠했을 것이다. A에게는 모델이 실제로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B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 마침 다리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두 다리를 하나씩 따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쿠키틀을 그리는 것처럼 다리의 외곽선을 통으로 그리는 것이 아닌가. B는 눈으로 모델 한 번 바라보고 도화지에 짧게 선 긋기를 연신 반복했다. 연필은 도화지 위에서 한참 멈췄다가 움직였고, 선은 느리게 이어졌다. 그 과정이 너무나 흥미로워서 ‘과연 저 빵틀이 제대로 다리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해서 한참 동안 B의 그림을 바라봤다. B는 쿠키틀(?)을 다 그린 후 가운데 선을 넣어 다리를 완성했다.
B는 이렇게 그리는 방법을 어디에서 배웠을까? 과거 누군가에게 배웠을까, 아니면 스스로 생각해 냈을까? 아니면 바로 직전 수업이었던 컨투어 드로잉에서 배웠을까? 우리는 컨투어 드로잉 수업에서 끊어지지 않는 하나의 선으로 볼펜, 물감, 집게 같은 사소한 물건에서 친구 모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상을 그렸다. 컨투어 드로잉을 할 때면 물체의 외곽을 그려 전체 형태를 잡은 다음 세부 묘사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 아이의 방법이 어디서 비롯되었든 아마도 그가 인체를 그리기 위해 생각해 낼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두 아이의 그림을 그리는 태도에서 발견한 것은 모두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방법에서 시작했고, 여러 장을 그리면서도 그 방법을 고수했다는 점이다. 그림 실력이 어떻든 두 아이의 그리는 방법은 각자에게는 양식이자 스타일이다. 두 아이는 그림 그리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무엇을 그리든 이 방식으로 그릴 것이다.
본다는 것은 습관적이다. 더구나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이 익숙하고, 그 방법으로 과제를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었거나 심지어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면 각자의 ‘보는 방식’은 아이들 안에서 더욱 견고해졌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보는 방식은 각자 안에서 견고한 ‘제도’처럼 자리 잡는다. 이쯤 되면 우리가 보이는 대로 보고 있는지 아는 대로 보고 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습관적이고 견고하며 관습적이기까지 한 ‘보는 방식’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야만 가능하다.
C는 수행평가 과제 설명을 듣자마자 도화지를 네 구역으로 나눴다. 각 칸에 네 명의 모델을 꽉 채웠으며 인체 비례조차 무시했다.
C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서툴고 망설이는 선들로 가득하다. C의 그림을 본 사람은 누구라도 그림의 주인이 그림을 배운 경험이 없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C가 그린 인물들은 신기하게도 실제 모델과 정말 많이 닮았다.) 그런데 그동안 C가 그린 그림들을 순서대로 놓고 관찰해 보면 그림에서 변하고 있는 무엇인가가 보이는 것 같다. 짐작건대 C는 수업을 거듭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던 방법(무엇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을 조금씩 강화시켰다. 특히 마지막 두 장의 그림, 체크무늬 옷소매 아이와 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 그림 사이의 변화는 의미 있어 보인다.
먼저 인체의 굴곡진 선 처리. 전자에 비해 후자의 다리 선을 보면 인체 골격을 비교적 정확하게 따라 그리고 있다. 두 번째, 명암 처리. 두 장의 그림에는 동일한 조명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앞 그림에는 목 아랫부분 말고는 명암 표현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반면 나중 그림에서는 인체의 오른쪽 부분에 균일하게 진한 연필 선을 칠했다. 이러한 명암 처리 방식은 수행평가 과제인 네 명의 친구를 그린 그림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나중 그림과 네 명의 친구를 그린 그림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보이며, 여전히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무언가가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이쯤 되면 눈치챘겠지만, 지금 나는 아이들의 그림 수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나타나는 ‘양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림 수준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저마다의 양식을 드러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아이들의 그림은 예술가의 그림과 다르다. 이 그림들은 학습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일지라도 학습이 끝난 순간 그 그림이 갖는 가치는 사라진다. 아이들의 그림의 가치는 수업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보여주는 양식은 예술가들이 자기 양식을 의도적으로 찾아가고자 하는 노력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고 아이들이 무엇을 학습했는지를 결과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앞에서 ‘제도’라는 단정적인 표현을 쓰긴 했지만, 아무리 견고한 성일지라도 한 순간의 우연에 의해 쉽게 허물어지기도 한다. 인상주의 화가 모네가 밀 낟가리에서 색채 더미를 발견했듯 우연은 우리를 새로운 보는 방식으로 이끈다. 하지만 이런 우연은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는다. 이는 수없는 반복 안에서 이미 시작된다. 그리고 그 차이는 아무나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힘은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에서 나온다. 차이가 발생했을 때 그 의미를 포착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차이는 그냥 사라지고 만다. 모네의 발견은 수많은 반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필연적인 우연’이다. 수업 과정에서 차이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장치는 교수학습 과정 안에 숨어있다. 미술교사들이 아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매체나 수업 방법을 고민하는 이유다.
차이를 만드는 ‘보는 방식’
나는 글머리에서 미술교육의 역할은 ‘보는 방식에 돌을 던지는 것. 익숙하게 생각하고 당연하게 봐왔던 것을 의심하고 새롭게 보는 것. 미묘한 변화를 포착하는 것’이라고 썼다. 만일 미술교육의 중요성이 창의성 교육에 있다고 한다면 새롭게 보고 미묘한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힘이야 말로 창의성 교육에서 중요한 조건이지 않을까?
A, B, C, 세 명의 아이들은 저마다의 ‘보는 방식’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C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보는 방식’은 앞서의 학습 결과를 반영하면서 작지만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면서 발전해 간다. 앞의 드로잉 수업 사례에서, 아이들은 이미 2주 전부터 컨투어 드로잉, 빛과 명암 수업, 도화지에 적절한 구도로 친구 그리기 등을 주제로 드로잉 수업을 하고 있었다. 이런 과정이 없이 첫 수업에서부터 커다란 4절 도화지를 내밀면서 네 사람의 친구를 한 화면에 그리라는 학습 과제를 제시했다면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2주간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다소의 두려움은 있지만 크게 당황하지 않고 그리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학습의 관점에서 보면 드로잉 수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C와 네 명의 친구를 드로잉 하는 C는 같은 C가 아니다.
아이들은 같은 교실에서 같은 것을 보면서도 각기 다른 것을 느끼며 서로 다른 개성을 찾아 성장한다. 느리지만 강직한 선, 넓적하고 편안한 면 등 각자의 출발점과 지향점에 따라 어떤 것은 선택하고 어떤 것은 배제하면서 다른 결과를 만들어 간다. 같은 교실에 있지만 각기 다른 과정과 결과를 얻는 것, 서툴러도 기죽지 않는 것, 다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미덕이 될 수 있는 것. 이것이 예술교육이 가진 특별함이다.(물론 미술실에서 늘 이런 아름다운 풍경이 벌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듀이는 ‘예술은 있는 그대로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의 어떤 측면을 강조하는 선택적 측면이 있고 이는 표현행위에서 정서가 차지하는 역할 때문’이라고 하였다.(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 중에서) 창의성은 요란하고 기발한 도깨비방망이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작은 차이를 주목하고 드러낼 수 있는 용기에서 나온다. 만일 아이들이 더 높은 단계에 이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차이는 더 커질 것이다.
‘성장’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만일 아이들이 지금과는 다른 어떤 것을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아이들 안에 참조할 만한 자원들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덧붙여 이전의 것과 차이가 있는 새로운 경험이 필요하다. 자원에는 성장과정에서의 다양한 경험, 환경, 가치관, 이미 있었던 미술의 경험 등이 포함되고, 그 가운데는 우리가 기능이라고 부르는 것도 있다. 그간 우리는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아이들의 표현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며 특히 기능교육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아이들 안에는 창의성이 이미 들어있어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발현되며, 기능교육은 이것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술교육에서 창의적인 표현과 도구와 재료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도구와 재료를 사용하는 바로 그곳에서 창의적인 표현이 나온다. 예컨대 빨간색 물감과 파란색 물감을 섞었을 때 나오는 색은 보라색이라고 답하는 학생이 과연 자주색에서 남색까지의 오묘한 색 변화를 느낀다 한들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창의적인 발상을 한다고 해도 거기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단지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주의할 것은 기능교육은 교육과정의 전체 맥락 안에 있어야 하며 기능을 익히는 것만을 수업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나오며
‘보는 방식’은 단순한 시각 현상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학습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선택과 배제의 과정에 숨어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의 선택의 결과다. 현재 나의 선택에 의해 내 안의 무엇인가가 변한다. 그 선택은 나의 ‘보는 방식’에 의한다. 그리고 이런 작은 선택들이 쌓여 더 큰 차이를 만들고 마침내는 ‘코끼리의 등을 부러뜨리는 지푸라기’가 되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한번 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보지 않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보는 방식'이 내 안에 하나의 양식으로 견고하게 자리 잡으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작지만 의미 있는 문인 ‘새로운 보는 방식’은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