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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Feb 14. 2018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두 권의 책

 두 권의 책


 이사를 했다.

 책장을 정리하면서 오래된 책 두 권이 나왔다. 고흐의 서간집 <반 고흐의 그림과 便紙(편지)>와 고흐의 화집 <VAN GOGH IN ARLES>.

 고흐의 서간집은 한문이 섞여 있는 제목에서 보듯 오래된 책으로, 국한문 혼용 시절에 쓰인 책이다. 겉보기에도 누렇게 바랜 이 책은 무려 세로 쓰기의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맨 뒷장을 펼치자 발행연도가 보인다. 1978년에 발행했다. '잘못된 책은 바꿔드립니다. '라는 활판 인쇄 향기 가득한 안내 문자가 웃음을 자아낸다.

 고흐의 화집 <VAN GOGH IN ARLES>은 역시 대학생일 때 작은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책이다. 여러 권의 화집 중 가장 사랑했던 책이었으나, 어느 순간 책을 잘 읽지 않게 되면서 책꽂이 한 귀퉁이에서 사랑받지 못한 지 여러 해가 흘렀다.

 이 글은 한 때 내가 가장 사랑했던 30년 된 오래된 책 두 권에 대한 이야기다.   


1. <VAN GOGH IN ARLES>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늘 삼촌이 계셨다. 아버지가 오 남매의 장남이었기 때문이다. 삼촌들은 고등학교 다닐 때가 되면 우리 집으로 와 졸업할 때까지 우리와 함께 살았다. 이중 둘째 작은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직장을 옮길때까지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 살았다. 둘째 작은아버지는 내 인생 최초로 짜장면과 군만두를 맛보게 해주신 분이시기도 하다. 작은아버지는 무심한 듯 보이지 않게 조카들을 많이 배려해주신 분이었다.  

 

 어느 해였을까, 화집에 1984년이라고 쓰여있으니 아마도 대학 2학년 때였을 것이다. 작은아버지가 오랜만에 우리 집에 오셨다. 외국 여행 중에 산 책이라면서 작은 아버지는 나에게 화집 한 권을 내밀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화집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화집을 다시 살펴보니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어쩌고 하는 단어가 있는 것을 보니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다녀오셨던 것 같다. 미술관에서 작은아버지는 고흐의 전시회를 본 후 전시 도록을 두 권 구입하셨고, 그중 한 권을 미술대학 다니고 있던 조카인 나에게 선물하신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나는 이 화집을 매우 소중하게 아꼈다. 그 이유는 내가 대학에 다니던 80년대가 화집이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흐의 화집이라면 서점의 다이제스트판으로도 구할 수 있었고, 도서관에 가면 제법 큰 사이즈의 세계 명화집 같은 것을 빌려 볼 수도 있었으니까.

 나는 이 화집에서 나는 고흐의 소묘를 처음 만났다.

 사람마다 자신의 취향이 다르니, 어떤 사람들은 고흐의 <해바라기>나 <자화상>을 좋아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별이 빛나는 밤>이나 <까마귀가 나르는 밀밭>과 같은 고흐 말년의 우울한 작품을 좋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해바라기, 자화상 정도를 알고 있었고, 고흐의 네덜란드 시기 작품인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이 화집에서 그의 소묘 작품, 특히 들판을 그린 그림을 접하면서 나는 해바라기나 자화상보다는 남프랑스 아를 지방의 들판을 그린 그의 소묘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와트만지에 연필과 밤색과 검은색의 다양한 굵기의 펜을 사용하여 그린 그의 들판은 다른 화가들의 풍경화와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준다. 그림의 4/5를 들판으로만 채운 그림을 상상할 수 있는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의 들판은 그냥 들판이다. 끝없는 지평선 너머로 펼쳐진 무한 공간.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의 소묘를 바라보면 마치 천 길 낭떠러지 끝에 서서 멀리 보이는 끝없는 들판과 마주 서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발끝으로부터 펼쳐진 내 앞의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들판 밖에. 그 들판은 지평선 너머로 끝없이 끝없이 달아나고 있다.

 그의 서간집에 따르면, 그는 이런 소묘를 유화를 그리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활용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의 유화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짧고 힘 있는 붓터치는 소묘에서는 굵고 짧은 선과 점 등으로 나타난다. 그는 연필과 펜을 주로 사용했는데, 펜의 굵기를 다르게 하거나 밤색과 검정색의 잉크를 섞어 쓰는 등 재료의 사용 방법에 변화를 주었다. 그림에 사용된 무수히 많은 선과 점에도 불구하고 소묘는 매우 간결하고 정돈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슬프게도 나는 이 책을 수 십번 펼쳐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읽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 영어가 너무나도 하찮기 때문에. 이사하면서 이 책을 재발견한 나는 이제라도 읽어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책을 펼쳤으나.... 하지만, 모르는 단어가 너무나 많아 다시 한번 좌절을 맛봐야만 했다!!!!!

 '그래, 화집은 보라고 있는 것이지 읽으라고 있는 것은 아니야,' 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2. 고흐의 서간집  <반 고흐의 그림과 편지>

  대학 다니던 시절, 나에게는 헌책방을 돌아다니던 취미가 있었다. 형제가 많았던 우리 집은 늘 용돈이 궁했고, 커피값도 모자랐던 대학생으로서는 새 책, 더구나 그림이 많이 들어있는 전공 관련 서적을 사서 보기에는 부담이 컸다. 결국 헌책방 밖에는 답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꼭 책을 읽겠다는 의지라기보다 일종의 지적 허영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먼지 자욱한 헌책방 몇 군데를 들러 읽고 싶은 책을 발굴했을 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발굴한 헌 책을 책꽂이에 꽂으며 미소 짓던 내 모습이라니. 지금은 그저 헛웃음만 나올 밖에.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서간집이었기 때문에 세로 쓰기의 난해함을 극복하고 끝까지 읽었던 것 같다. 노오랗게 변한 책장 사이사이에 내가 표시해놓았음이 분명한 줄 긋기, 괄호....


 '진실한 생활이 없는 영원한 우울 속에 살고 있다 손 치더라도, 역시 인간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점점 드는구나.'


 '자연으로부터 받는 감각적인 진실에 의한 충동, 바로 그것이 우리들을 이끌어 주는 것으로서, 가령 충동이 너무나 강한 데다 작업을 하고 있지 않다고 느낄 만큼 강한 경우도 있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참다운 애정을 잃게 만든다. 전혀 그대로라는 게 틀림없기는 하지만, 그와 반대로 참다운 애정은 예술을 꺼리는 것이다'


 '더욱 색깔을 강렬하게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 아프리카에 가까운 것이다.'


 '별에 의해서 희망을 표시하는 것. 석양의 번뜩임에 의해서 어떤 인간의 결렬함을 나타내는 것. 물론 거기에는 표면적인 사실(事實)은 없지만, 그것이야말로 실재하는 것이 아닐는지.


'인생이란 어떻든 짧고 덧없는 것이야. 그렇다고 해서 살아있는 존재를 경멸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 정반대이지.'

 어떤 부분은 그 줄을 어제 긋기라도 한 것처럼 그때의 마음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내가 왜 여기에 줄을 그었는지 이해 안 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건 아마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최근에 예술의 전당에서 본 전시회 <그대, 나의 MUSE>가 생각났다. 이 전시회는 고흐, 마티스, 르느와르 등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한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존재, MUSE를 주제로 꾸민 일종의 미디어 아트 쇼였는데, 거기에서 고흐에게 예술적 영감을 준 존재로 남프랑스의 아를을 들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흐의 유명한 작품 대부분은 아를에서 그려졌고, 그곳에서 그는 스스로도 표현했듯이 예술혼에 불타 마치 그림 그리는 기계처럼 그렸다고 하니 아를의 붉은 태양은 그의 뮤즈였음이 분명하다. 12시간 그리고 12시간 잠을 잤다는 표현이 서간집에 나올 정도로 작품에 혼신을 쏟았던 시절이었다.

<나의 뮤즈>전시회의 고흐의 방에 재현해놓은 고흐의 편지

 그런데, 나는 고흐의 뮤즈는 테오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테오가 고흐의 예술세계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지는 않았을지는 모르나 고흐의 소묘를 보고 재능을 발견해 화가의 길을 권유한 것은 테오였다.(그는 자신이 형의 예술을 위해 헌신하게 될 것을 알았을까?) 그리고 많은 편지가 증명하듯 고흐는 동생 테오와 예술에 대한 것, 사랑에 대한 것, 동시대 예술과 문학에 대한 것, 고단한 삶과 경제 지원, 심지어 이성에 대한 고민까지 의논했다. 동생의 헌신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화가 고흐는 없었을 것이다.


 고흐의 편지는 많은 부분에서 태오의 지원, 즉 태오가 보내준 돈이나 물감에 대해 감사하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가 화구를 사는데 필요한 돈은 얼마고 물감은 어떤 색이 필요한데 어디에서 구입하는 게 좋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면 테오는 형편 닿는 대로 돈을 보냈고, 그림 그리는 천, 물감, 생활비를 비롯한 모든 것을 지원했다. 반면 고흐는 화상이었던 동생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내주었고, 그림의 판매를 통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타개하기를 강렬히 바랐다. 그러나 모두 알고 있듯이 불행하게도 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화포와 물감을 보내 주어서 정말 고맙다. 방금 도착했어. 이번에는 9프랑 80의 운임을 지불해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 다음번 네 편지를 받고 나서 찾으러 갈 작정이다. 지금은 때마침 손이 없구나. '

 

 테오는 왜 하필 착불 택배를 보냈던 것일까? 아마도 고흐는 돈이 없었던 것 같다. 택배비를 지불할 수 없었던 그는 다음 편지에서 동생이 보내준 돈을 받아서 그 운임을 지불하지 않았을까.


 고흐는 자주 동생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마치 아이들이 엄마에게 운동화를 조르듯이 동생에게 조르고 있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네가 힘들면 안 사줘도 된다. 뭐, 이런 식이다. 아마도 고흐의 마음에는 동생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했던 것 같다.   

'네 편지와 동봉해준 50프랑 고맙다. (중략) 내 옷가지는 확실히 끔찍스럽게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실은 지난주에 매우 질이 좋은 20프랑짜리 검은색 빌로드 윗도리와 새 모자를 샀기 때문에 막상 급할 것은 없다. 그런데 내가 그린 예의 우편배달부는, 이사할 때마다 늘 가구를 새로 사들인다 판다 하는 사나이라서, 어차피 그 사람한테 필요한 가구의 가격에 대해서 대강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튼튼하고 오래 견딜만한 좋은 침대는 여기서 적어도 150프랑 주지 않으면 사들일 수 없다는구나.

 그렇지만 이 쪽 계산이 그것 때문에 빗나간다는 것은 아니다. 주거비를 줄여가면, 연간의 경비를 들이지 않더라도 일 년이 지나면 가구가 갖춰질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가능하게 되면 그럴 작정이다. 만약 이처럼 안정되어 살 수 있는 기히를 놓치는 날이면, 고갱하고 나는 조그만 집에서 몇 년이고 구질구질하게 살다가 어처구니없이 돼버리고 말 것이 뻔하다.


 고흐는 아를에 화가들의 아뜰리에를 만들면 좋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아마도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남프랑스에서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아를에서 화가들의 공동 작업장을 만들고, 매일 함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작업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고갱에게 특히 적극적으로 아를로 올 것을 권유했는데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고갱을 돕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그와 고갱의 공동생활에 필요한 경비는 화상이었던 동생 테오가 후원하고, 고갱은 자신의 작품을 테오에게 보내주는 방식이었다. 마침내 고갱이 자신의 제안에 응했을 때 고흐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개성 강한 두 화가의 동거는 다들 알고 있듯 비극적인 사건으로 끝났고, 고갱은 짐을 싸서 도망치듯 타히티로 떠난다. (아, 고갱의 일기도 어디 처박혀 있을 텐데.... 고갱의 일기를 보면 고흐와의 사건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


 고흐는 화가로서의 자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을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이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것은 작품 수가 적기 때문이지. 그 반면에 르키르도나 몬티셀리, 드미에, 코로, 드비니, 밀레는 대부분의 경우 매우 빨리 그려지고 그 수효도 비교적 많은데도 불구하고 결코 뒤지지 않는다.

 내가 그린 것들 중에서도 어떤 풍경화는 최대한으로 빠르게 그렸는데도 가장 낫다는 것을 알았다. 네게 보낸 소묘와 똑같은 그림인 <추수>와 <낟가리>의 유화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고흐의 비극적 삶과 죽음에 지나치게 경도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편지에서 본 그는 지나치게 진지하고 지나치게 사색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예술과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업의 진행 과정과 성취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단지 나는 파리에서 배운 것이 나의 내부에서 사라져 버리고, 인상파 화가들을 사귀기 전에 시골에 있던 때의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동안에 인상파 화가들이 그들보다도 오히려 드로크로아(아마도 들라크르와. 78년도의 번역임을 기억하자.)의 사고에 의해서 풍성해진 나의 수법에 대해서 군소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결코 놀라지 않으리라. 결국 나는 목전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묘사하기보다는 그것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색채를 쓰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시기, 고흐는 밀레의 그림처럼 어두운 색채를 사용했다. 그의 색채가 밝아진 것은 파리에서 인상파 그림의 영향을 받고부터였다. 이 시기 그는 인상파들과 같이 점묘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는 빛과 관련한 인상파 그림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아를로 와서야 비로소 그는 인상파의 기법으로부터 벗어나 '고흐 답게' 그리기 시작하였다.


또, 죽음을 언급한 글도 있다.


 '모든 예술가, 시인, 음악가, 화가들이 물질적으로 불행한 것은 확실히 이상한 현상이구나. -설령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최근에 네가 모파상에 대해서 말한 것은 모름지기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럿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다루어질 것이야. 우리들에겐 생명의 전부가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 이전의 반쪽밖에 우리는 알고 있지 못한 것일까.


 수많은 화가들이란-감히 그들에 대해 말하자면-죽어서 매장되어 있더라도, 그 작품을 통해서 다음 대부터 몇 대에 걸쳐서까지 화젯거리가 되는 것이야. 그것만이 모두인 것인가, 아니면 그밖에 더 무엇이 있는 것일까. 화가의 생애에 있어서 모름지기 죽음은 그들이 마주치는 최대의 고난은 아닌 것이다. 나로서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지는 않지만, 언제나 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도에 나타난 거리나 마을을 표시하는 흑점이 꿈을 부여하듯이, 쉽사리 몽상에 젖고 마는 것이다.


.... 기차를 타고 타라스콘이나 앙으로 가는 것처럼 우리는 별나라에 가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별나라에 갈 수 없는 것과, 죽고 나면 기차를 탈 수 없는 것과는, 이런 추리 속에서 확실히 사실이다. 요컨대, 콜레라며 사립상 결석, 폐병, 암이, 기선이나 합승마차며 기차가 지상의 교통기관인 것처럼, 천상의 교통기관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도 없다. 노쇄해서 조용히 죽는 것은 걸어가는 쪽이다.'


 그는 37세의 젊은 나이로 별나라로 갔다. 그는 기차를 탔을까?




천재에의 동경

 미술을 막 시작한 어린 화가들은 누구나 천재를 꿈꾼다. 언젠가는 위대한 예술작품을 그리고야 말리라. 그러나 현실은 비루하다. 일찌감치 한계를 절감한 어린 화가는 실기실이 아니라 동아리실에서 청춘을 불태운다. 흔한 19살 미술대학 1학년 여학생의 생활. 쯧.


 19살의 대학 새내기에게 고흐의 삶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불행했던 삶, 이루지 못한 사랑, 영혼을 뒤흔드는 그림(화집으로만 봤지만.), 그리고 죽음.

 그는 화가였지만 글을 읽다 보면 시인을 해도 참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프랑스어로 읽으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지만, 기차를 타고 별나라, 죽음으로 간다는 비유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고흐의 삶을 알아가면서 나는 명화를 그리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더구나 예술사에서 만나는 많은 수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희한하게도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 않은가! 예술사를 읽으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천재는 요절한다는데, 나는 요절할 것 같지가 않아. 그래서 나는 명작을 그릴 수없어.'

 또는

 '아마도 나는 요절할 거야. 왜냐하면 나는 천재니까.'

 푸하하,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의 오류라니! 뭐, 그때는 어렸으니까. 어린아이에게는 뭐가 되었든 핑계가 필요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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