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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Oct 22. 2024

작업실

평생의 소원, 작업실을 계약하고 왔다.


출근하지 않는 주말마다  여를 돌아다녔나 보다. 집에서 걸어 30분 거리, 밝고 따뜻한 남향, 최소 15평에서 20평, 목공가능할 것, 잠깐이라도 주차가 돼야 하고. 권리금과 관리비가 없을 것. 지하철 이용이 가능할 것. 아, 자주 올리지 않는 저렴한 집세도 있구나. 그리고 이런 조건도 있었다. 2층일 것. 나이 들어가는 부실한 무릎근육을 고려한 조건이었다. 또 밤늦게 그림을 그리고 돌아갈 때 안전한 환경일 것. 아무리 넓고 조건이 좋아도 으슥해서  나의 미모와 상관없이 불안한 마음이 들면 되겠는가? 끝도 없는 조건들. 과연 내가 원하는 작업실을 구할 수 있을까? 그것도 수도권에서? 신기한 것은 작업실을 구하러 다니면서 조건이 하나씩 더 늘어간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10평가량 상가를 찾아다녔는데 다니다 보니 생각보다 넓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원하는 크기가 커졌다. 어느 곳은 널찍했는데 화장실 상태가 심란했다. 깨끗한 화장실 조건이 새로 붙었다. 사라진 조건도 있었다. 지하철 이용이 가능할 것. 이건 어찌할 수 없었다. 내가 감당하기엔 역세권 상가는  너무 비쌌다.


작업실 구하는데 또 하나의 걸림돌은 재개발이었다. 도시 곳곳이 재개발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여러 조건, 특히 관리비를 고려한다면 내가 찾아야 하는 상가는 3층에서 5층 사이의 개인 상가주택이었은데, 그런 상가가 있는 여러 곳이 재개발 예정이거나 재건축 조합을 만들고 있었다. 이 말은 아무리 마음에 드는 공간이 생겨도 수년 내에 이사를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익숙한 골목, 담장 너머 익어가는 감나무, 오래된 느티나무, 그 아래 네모난 빨강 파랑 나이롱 의자에 앉아 있는 동네 주민들. 인천의 오래된 동네를 돌아다니는 경험은 특별했다. 이런 시간의 흔적들이 다 사라지는구나. 좁은 골목, 주차난. 그런데 다 지우고 새로 쌓는 방법만이 능사일지,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인구도 준다는데 이 많은 고층 아파트는 누가 다 들어가 살며 그 상가에는 누가 또 와서 물건을 사고 먹고 마실까? 저도 모르게 내 것이 아님이 분명한 고민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 어렵다. 상가가 마음 들면 비싸거나 주차가 안되거나 아랫 상가가 목공을 못하는 조건이거나 상가 안에 수도 시설이 없거나 등등. 결정을 못하고 부동산 탐방으로 주말을 채우는 일이 늘었다. 불황을 반증하듯 이곳저곳 노란 임대 플래카드가 걸린 곳이 많이 있었지만 막상 전화를 해보면 내 수준에는 터무니없이 비싸 엄두를 내기조차 어려웠다. 얼마를 벌어야 저 가겟세를 내고 이익을 가져갈 수 있는 것일까? 모르는 세계 하나를 엿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또 월세에 버금가는 관리비를 내야 하는 곳도 있었다. 사람들이 부를 축척하는 방법은 참 다양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오늘 저녁, 마침내 작업실을 계약하고 왔다. 집에서 걸어 30분 거리, 원했던 2층보다 조금 높은 3층, 따뜻한 남향, 주차 공간, 수도 시설. 생각했던 조건을 100프로 만족시키는 곳은 아니지만 여러 곳을 보러 다니면서 포기할 것과 꼭 있어야 할 조건을 적당히 타협한 결과였다. 작업할 공간, 다른 말로 마음껏 어지를 수 있는 공간이 생겨서 참 좋다. 공간이 없어서 그림을 열심히 안 그렸던 건 아니지만 공간이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그리지 않을까? 무엇보다 주말이 온전하게 다시 내 것이 되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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