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처럼 스스로(自) 따뜻(温)해질 마을
무량사에서 돌아올 즈음엔 꽤 어두웠어요. 배도 고파오기 시작하고, 날은 쌀랑했고, 같은 차를 탄 일행들과도 아직 머쓱. 온기를 더해보고자 돌아가며 듣고 싶은 곡을 틀었습니다. 후추스의 ‘온통, 그대’, 문문의 ‘결혼’, 서울전자음악단의 ‘꿈에 들어와’ 같은 곡이 기억나네요. 하지만 허기와 추위와 약간의 어색함까지 깨긴 어려웠어요.
이것은 호스트 분들의 ‘큰 그림’이었을까요? 다음 목적지인 수월옥에서 모든 게 충족되었거든요.
수월옥이 있는 규암면 둑방길은 밤이 되니 인적이 뜸했어요. 안개 사이를 걷다보니 따스한 불빛과 함께 풍미 가득한 향이 솔솔 나기 시작합니다.
수월옥은 커다란 은행나무 품속에 자리잡은 아담한 고택이었어요. 늦가을답게 은행잎이 마당 가득 떨어져있고,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담소를 나누며 기다리고 있었어요.
수월옥은 원래 ‘요정’이었다고해요. 마을이 쇠락하면서 점점 그 쓰임을 잃었는데 내부를 개조해서 이렇게 식당으로 다시 태어났어요. 한옥은 층고가 낮아 그냥 두었으면 불편했을텐데 서까래는 살리고 바닥을 낮추셨더라고요. 그래서 더 분위기가 아늑하고 매혹적이기까지 했지요.
우선 부여 땅에서 길러진 야채와 수제치즈로 입맛을 돋구었어요. 이어서 지역 전통주인 소곡주와 함께 감 깍두기, 전이 한상 가득 차려졌어요.
저녁을 준비해 주신 유바카 쉐프(@yubakastudio)님의 음식은 너무 예뻐서 접시가 등장할 때마다 탄성이 터져나왔어요. 보기에만 좋은 게 아니라 무척 맛있고 정성스러워서, 한 입 한 입 먹을 때마다 기운이 마구 채워졌답니다.
(배고픈 시간이라면 특히 더) 죄송합니다만, 음식 사진으로 도배 좀 하겠습니다.
쉐프님을 잠시 모셔 감사인사를 드렸어요. 정말 배도 눈도 마음도 행복해지는 식사였거든요. 이 분의 음식 뿐 아니라 스타일과 미소가, 두고두고 선물처럼 마음에 남았답니다.
‘구경도 했고, 밥도 먹었고... 그래서 라이프쉐어링은 언제 하는 겁니까?’ 싶을 즈음, 드디어 숙소로 이동합니다.
이 날 묵은 ‘이안당’은 100년이 다 되어가는 한옥이에요. 조선의 전통적인 한옥과 해방 이후 도시형한옥의 다리를 이어주는 소중한 공간이었어요. 일본풍의 건축양식에, 소품에서는 특유의 생활감이 묻어나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답니다. 누군가에겐 할머니댁 같았고, 누군가에겐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을 떠올리게하는 곳이었어요.
삼삼오오 무릎을 맞대고 앉아 삶을 나눕니다.
유쾌하다가도 눈물나고 때로는 감동적이고 또 농밀했던 우리의 이야기는 그 날, 그 방에서의 공기와 온도와 함께 기억에 남아 있어요.
조용히 일어나 짧은 조깅을 했어요. 해가 떴을 시간인데도 강변이라그런지 아직 안개가 자욱.
새로운 하루를 시작합니다. 전날 저녁을 보낸 수월옥에서 제대로 된 브런치를 배불리 먹고, (아직 오픈 전인) 카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바리스타는 한국무용을 하시는 선생님. 섬세한 손끝에서 브루잉된 모닝커피라니요!
수북로 37, 수월옥과 붙어있는 이 카페가 정식오픈하면 꼭 들러보세요~ 아홉칸의 방이 조막조막 붙어있던 공간을 어떻게 개방감 넘치게 바꾸었는지, 서까래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상량대엔 뭐라고 적혀있는지, 다른 계절... 다른 시간엔 어떤 풍경일지 상상하며 기분 좋은 아침을 보냈어요..
이어서 박경아 자온길 프로젝트 대표님을 따라 쭐래쭐래 수북로와 자온길 구석구석을 걸었어요. 전날엔 날도 어둡고 길이 설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목공소와 공방. 에어비엔비로 묵을 수 있는 숙소, 오픈 준비중인 빵집과 식당, 펍, 떡카페, 쇼룸... 마을에 하나하나 숨을 불어 넣은, 불어 넣을 공간과 거기에서 작업해나갈 분들의 온기가 오롯이 전해졌어요.
언덕 위 노란색 건물은 극장이었다고 해요. 영사기를 2대까지 돌린 번화했던 시절, 마을의 연인과 가족, 친구들이 한껏 차려입고 나와 북적였을 풍경을 떠올려봅니다. 건물 정면엔 그림꾼들이 영화 포스터를 그렸겠지요. 시절을 겪어내며 확장과 개축을 거듭해 다양한 양식을 구석구석에 품게 되었다고요. 그래서 건축가들이 매우 흥미로워한다고 하네요.
창고로 쓰이다가 철거될 예정이었던 저 건물을 자온길 프로젝트에서 매입했다고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도 모르게 ‘아이고~ 감사합니다’ 소리가 나오더라고요. 쇼룸으로 쓰일 예정이라고 하니, 내년 봄쯤엔 세월의 흔적을 품은채로 더욱 멋스러워진 극장 어르신을 만나볼 수 있겠지요?
짧다면 짧은 1박 2일동안 정말 많은 풍경과 사람과 이야기를 만났어요. 라이프쉐어링 호스트 분들뿐 아니라 참가자들, 부여 자온길 프로젝트 멤버들이 서로 밀고 당겨주며 풍요로운 시간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늦가을 정취와 여러분들의 베품을 듬뿍 받고 저의 에너지도 덩달아 올라갔습니다.
스스로 따뜻해질, 자온길을 조금일찍 만나게 되어 영광이었어요. 자온길 활동가 분들도 우리도, 앞을 가로막는 여러가지 생각과 장애물에 지지 말고... 더 성장하고 아름다워져서 내년봄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