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몸을 이루는 이야기

by 기림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오늘 하루도 요란스럽다. 누군가의 이야기는 지독히도 이어질 것이고, 누군가의 이야기는 잔인하게도 막을 내렸을 것이다. 얼마 전엔 직장에서 한 선생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죽은 자가 내 안에 살아 있다는 말이 예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랬더니 선생님이 들뜬 목소리로 당연히 모두 내 속에 살아있다며 의연하게 답했다. 자기는 어린 날 감기에 들거나 아프면 어머니께서 그렇게 콩나물국을 끓여주고 사과를 깎아 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비록 돌아가셨지만 선생님은 지금도 아프면 꼭 콩나물국을 끓여 먹고 사과를 먹는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마치 어머니가 직접 자신을 돌보아주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 기억이 이어져 선생님은 자식들이 아플 때도 꼭 콩나물국을 끓여주고 사과를 깎아준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선생님의 눈빛이 반짝반짝하고 따듯했다.


우리 할머니는 내가 아플 때면 참기름 향이 살살 올라오는 달걀죽을 끓여주셨다. 윤기도는 황금빛의 달걀죽에 대비되는 묵은지의 색이 선선하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파지는데, 아픔은 꼭 외로움을 끌고 마음속으로 쳐들어온다. 외로움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한다. 할머니의 달걀 죽은 내 아픔과 외로움에 크나큰 안식처였다. 그 돌봄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든든하게 내 마음 한 구석에 버티고 서서 내가 받은 수많은 사랑 중 하나의 지표가 된다. 내 아픔은 항상 그 아픔을 돌봐주는 사람들과 함께했다. 내 아픔은 달걀죽에 묵은지를 올려주던 할머니의 손길로. 때론 아빠가 손에 들려준 하나도 맛이 안 나던 요상한 포도 주스의 맛으로. 나를 너무나 편안하게 만드는 우리 엄마의 자장가로 기억된다.


나는 결코 혼자 클 수 없었다. 할머니의 달걀죽으로, 엄마가 할머니에게 배운 엄마버전 달걀죽으로, 아빠가 사주던 포도주스로, 자기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제일 잘한다며 가끔 만들어준 찜닭 볶음밥으로 컸다. 또 나는 우리 이모가 해준 김치로, 친구들이 나누어준 과자로, 친구네 놀러 가면 부모님이 해주던 요리로, 학교 급식실에서 먹던 급식으로, 문방구에서 먹던 불량식품으로, 카페에서 마시던 요거트 스무디로 컸다.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읽어주시던 동화책으로 컸고, 학교서 소리 내 읽던 교과서로 컸다. 운동장 끝까지 쫓아 머리를 쥐어뜯었던 그 애를 향한 분노로 나는 컸다. 수업시간 떠든다고 밀대로 엉덩이를 맞던 그 아픔으로 컸다. 내가 어린 날 죽인 병아리를 기억하며 컸다. 수만 마리의 닭들이 실려나가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일하며 컸다.


선생님의 콩나물국과 나의 달걀죽에 담긴 이야기와 기억은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갈까? 아빠가 밤늦게 돌아오며 싸들고 왔던 시장통닭의 기억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나는 몇 대를 거슬러 이 달걀죽을, 볶음밥을 전해줄 수 있을까? 내가 아픈 날마다 먹어치운 달걀은 어디서 왔고, 쌀은 어디서 왔을까? 내가 읽은 동화책은 누가 썼고 누구의 인생을 담고 있을까? 내가 머리를 뜯어준 그 애는 어디서 뭘 하고 살까? 밀대를 고쳐 잡던 그 선생님은 어떤 체벌로 유년시절을 보냈을까? 그 병아리가 내게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닭과 동물의 죽음 위에 서있는가? 이 동물들이 자연에서 살았다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살았을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이야기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을까? 수많은 이야기와 가능성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내 이야기가 곧 내가 만난 모든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흘러간다. 함께 우리의 몸을 채워나간다. 이 시공간을 가득 차게 만든다.


나의 몸은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우리들의 몸은 이야기의 덩어리다. 수많은 살아가던 것들의 이야기가 내려와 결실이 된 살아 숨 쉬는 서사이다. 살아남은 이들이 끝끝내 지니고 있던, 죽어간 이들의 기억이 남아 숨 쉬는 공간이다. 인류의 시작점에서부터 오늘이 이어지는 이 순간까지 이야기는 이어지고 있다. 계속 쓰여지고 있다. 죽은 자들은 죽지 않아 불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을 살아 숨 쉬고 있는 모든 이들의 피와 살과 뼈에 그들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이어져 나가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 아픔, 사랑, 슬픔, 분노 모두 그들의 흔적일 것이다.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잊히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해도 인류 마지막 순간 그 끝까지 몸이 살아 숨 쉬는 한 몸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