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은 처음으로 사람들이랑 레스토랑에서 같이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혼자 있을 때와는 다르게 큰소리로 웃는 순간도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꽤 재밌고 즐거웠다.
그렇게 2시간가량이 지나자 난 이제 그만 충분하다는 느낌이 몰려왔다. 분명 유쾌했지만, 이제는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나만의 것을 기록하는 행위가 나에게 더 소중해졌음을 느꼈다.
더 크게 웃었다고 해서 행복감을 더 깊이 느끼는 것은 아니다.소리 없는 것이 더 묵직하고 강할 때도 있는 법이다. 지금 이 여정길에서의 나의 행복이 그렇다.
그들은 맥주를 더 마시고 싶다며 마트에 장을 보러 갔고, 저녁 10시까지 정원에서 다 같이 술을 마시며 즐겁게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유튜브를 편집하고,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며 내일의 루트를 설정하고, 잠시 몸과 소통하다가 잠이 들었다.
이 여정길을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고 있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정답이란 없다.
각자의 취향대로 즐길 뿐이다. 그저 다름을 인정하면 된다. 그뿐이다.
그럼 서로가 자유로울 수 있다.
새벽 5시 반에 눈이 떠졌고 슬슬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아침으로는 어제 사온 복숭아 2개를 먹었다.
이곳에 와서 만나는 한국인 분들에게 계속 듣는 소리가 있었다.
"되게 일찍 일어나시는 것 같아요."
"보통 몇 시에 출발하세요?"
"저는 6시 반에서 7시 사이에 출발해요."
"와, 진짜 일찍 가시네요. 되게 부지런하시다."
"보니까 일찍 출발하고 일찍 도착하시는 것 같아요. 대단해요."
"걸음이 빠르신 것 같아요."
등등.
'내가 그런가?' 싶기도 하고
"아, 전 일찍 출발해서 일찍 도착하는 게 좋더라고요!"라며 웃음으로 답했고, 그렇게 오늘도 남들보다 일찍 길을 나섰다.
그렇게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나는 그동안 살면서 "부지런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너는 왜 이렇게 애가 게으르니."
"너는 왜 이렇게 느리니."
"부지런하지 못하다."
"불성실하다."
"잠이 너무 많아, 너는."
나에게는 언제나 '게으름'과 '불성실'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렇게 수없이 들어온 이 단어들은 나 스스로도 나를 그리 평가했다. '나는 원래 게으르고, 불성실한 사람이야, '라고 치부하며 살아왔는데, 이 힘들다는 순례길에서 나는 누구보다도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후려치기 당하면서 그토록 게으른 나 자신을 혐오하고 비하하며 자포자기 상태로 살아왔건만. 그 지난날들의 내가 너무나 안타깝고 안쓰러워졌다.
내가 게으르고 불성실해서 못났던 게 아니라, 그저 나에게 맞지 않은 길이었음을.
내 안의 열정과 에너지가 도무지 들끓을 수가 없었던 길이었음을.
그러면서 다짐했다.
이 여정길에서 아무리 게을러 보이고 느린 사람을 보더라도, 전혀 즐기지 못하는 사람을 보더라도 나는 함부로 그들을 재단하고 평가하지 말아야지. 그는 그저 이 길이 자신과 맞지 않은 길임을 깨닫고 있는 중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나의 기준에서 판단치 말아야 함을.
모두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와 특성, 취향이 각자 다를 뿐이다. 모두가 똑같은 기준일 수 없기에, 재능인 것이다. 우월함을 느낄 이유도,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기쁘고 설레었다.
'아, 이건 나의 재능이 확실하다.'
역시나 해는 뜬다.
날씨가 우중충해서인지 1시간이 넘도록 어두컴컴했다. 사방이 어두우니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서 나아간다. 빛을 코 앞에 비추는 것보다 멀리 비춰야 훨씬 더 길이 밝아진다.
어제는 내가 가야 할 길이 눈에 훤히 보이지만 목적지가 너무 멀다는 막막함에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내 발을 보며 힘을 내었는데, 오늘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에 빛을 멀리 비추고 시야를 넓게 보며 나아간다. 이렇게 어두울 때는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지도 않게 된다. 어차피 어둠 속이라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온통 너무 깜깜해서 앞 길이 막막할 때에는, 차라리 고개를 들어 시야를 멀리 보는 것이 이 어둠을 뚫고 가는 방법임을 새삼 느낀다. 나의 어둠에 빠져 너무나 작은 시야에 갇혀버리면 오히려 더 넘어지기 쉬우니까.
그리고 들었던 또 다른 생각은, 이렇게 어두운 채로 평생 걸어가야 한다면 정말로 절망적이지 않을까. 조금도 깨어있지 못하고 사고 없이 되는대로 살아간다면,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도, 장애물도, 방향도, 길도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겠구나.
매 순간 조금 더 깨어있는 의식으로 나만의 이 여정을 밝게 비추며 살아가야지.
역시나 해는 뜬다.
해가 뜰 거라는 것을 알기에 어둠이 두렵지 않았던 것 같다. 걷다 보면 밝아질 것을 아니까.
삶에서 '희망'이란 참 중요한 가치가 아닐는지.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어둠에 작은 별빛과도 같은 희망을 선물해줄 수 있는 날이 올까?'
첫 마을에 도착했다. Sansol 산솔이라는 마을이다.
이름이 참 정겹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 유난히 첫 마을이 반가웠다.
1시간을 넘게 어둠 속의 밭길을 걷다 보니 마을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이 반가웠다. 그리고 어제 여기에 묵었던 순례자들이 하나 둘 나오며 걷기 시작하는 모습들이 반가웠다.
아무리 혼자만의 시간이 자유롭고 좋다 하더라도 혼자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건 역시 아니다. 홀로 걷다가도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그들의 살아가는 분위기를 느끼는 것 또한 나의 즐거움이다.
따로, 그렇지만 또 같이 살아감을 느낀다.
BE REAL.
이제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다리 핏이 달라짐을 느끼고 있다.
'내 몸도 열심히 적응하고 있구나, 너희도 너희대로 이 길을 걸으며 확장해가고 있구나.'
내 몸이 문득 사랑스러워 보인다. 나의 모든 부분들은 언제나 나를 위해 애쓰고 있었다. 여기저기 아픈 부위들이 있지만, 그렇기에 또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흙먼지에 둘러싸여 이제는 많이 더러워진 내 등산화가 너무 멋져 보였다. 진짜 등산화스러워져서. 자기다움을 찾아간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여기저기 떼가 묻고, 생채기가 났더라도, 자기다움을 지닐 때 가장 멋지고 매력적인 거구나.
어떤 외국인 중년 여성 순례자 분께서 이 그림을 정성스레 찍으시길래, 나도 호기심에 따라 찍어보았다.
그리고 바로 오른쪽에는 이런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나는 이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 감탄을 하며 다시 사진을 찍었다. 외국인을 따라 찍었던 사진은 오늘 사진 정리를 하면 바로 내 사진첩에서 삭제될 것이다. 기억에서도 바로 지워지겠지.
역시 같은 길 위에서도 바라보는 시야가 다르고, 느끼는 것이 다르고, 담아가는 것도 다르구나. 그 사람에게는 건물에 걸려있던 종교적인 그림이, 나에게는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이 더 와 닿았던 거다. 종종 서로 다름을 느끼는 것이 꽤 신기하고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Be REAL
Be real이란 낙서를 보았다.
무슨 의미로 적은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낙서와 함께 나는 나만의 의미를 찾는다.
'그래, 나는 지금 이 길에 존재하고 있지. 나의 모든 여정들 속에서 항상 굳건하게 서있고 싶다, 진짜 내 모습으로.'
걸은 지 2시간쯤 지났을까. 문득 덥다는 생각이 들어 바람막이를 벗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벗었다. 벗고 나니 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아주 미세하게 빗방울이 떨어진다.
'아, 이런 타이밍이 참 짓궂네.'
옷을 다시 입기 위해 멈추기는 좀 애매했다. 이미 걷기 시작했기에 조금 참기로 했다.
아, 인생은 역시 타이밍이야.
이젠 이런 것에서도 인생을 들먹이는 경지에 이른 건가? 순례길을 그만 하산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앞은 먹구름.
오른쪽은 햇살이 보이는 구름이.
왼쪽은 동이 트는 것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같은 공간에서 이리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이 그저 신기하고 아름다웠고 감탄스러웠다.
가지각색의 매력을 담고 있는 자연.
예전에는 그저 예쁜 모습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들에게 예쁘고 밝은 모습만을 보여주는 사람. 그런 이미지 메이킹을 잘하고 싶었고, 이미지 메이킹을 잘하는 사람들이 부럽고 질투 났다.
하지만 이제는 내 안의 다양한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내보이고 싶다. 자연처럼, 나도 자연스럽게. 무엇보다 내 안의 다양한 고유성들을 최대한 많이 발굴해내고 싶다.
한국인 분들을 만나게 되어 끝무렵에는 셋이서 함께 걷게 되었다. 나보다 다음 마을까지 더 가는 루트였는데, 에어비앤비로 아파트를 하루 빌렸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다음 마을까지 가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제안을 해왔다. 라면 수제비랑 고기.
채식을 하기에 고기는 전혀 끌리지 않았지만 '라면 수제비'에는 살짝 혹했다. 거기에 에어비앤비라니. 마음이 살짝 동요했지만 역시 일찍 도착해서 씻고 써야 할 글과 편집할 영상들, 명상과 숙제들이 떠올랐다. 해야 할 압박감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해내고 싶은 것들이었다. 걷는 것만큼 이상으로 이제 나에게 소중해진 것들이다.
VIANA 비아나
와-출발한 지 4시간 만인 오전 11시에 목적지인 Viana 비아나에 도착했다. 오늘은 총 19km를 걸었다. 알베르게는 보통 12시에 오픈하는 데다가 마침 두 친구가 이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간다기에 셋이서 함께 먹기로 했다.
베지터블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
그렇게 레스토랑에 들어갔는데 며칠 전 만났던 동갑내기 친구 혜수를 우연히 만났다.
저녁을 한번 먹었던 사이로 서로 공통점이 많아 대화가 잘 통했던 친구였던 터라, 이 여정길에서 언제 한 번은 다시 만나자고 했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반가웠고, 또 그렇듯 서로 자연스럽게 인사를 고하고 헤어졌다.
만나고 헤어지고 가 일상이 되어버린 이 길에서, 앞으로는 모든 인연들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더 자연스럽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의 알베르게 풍경.
Albergue andres munoz 안드레스 무뇨스 알베르게 (8유로)
진짜 만원의 행복이다.
와.. 이런 풍경이라니. 가만히 걸터앉아 오늘 하루를 기록하는 순간이라니. 이런 게 행복이지.
비아나에서 묵을 예정인 순례자들에게 안드레스 무뇨스 알베르게를 꼭 추천해주고 싶다. 너무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