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아름답게 꽃 피우기 위해 웅크리기 시작한 거니까
산티아고 순례길 Day18
2019.10.18
부르고스 Burgos → 따르다호스 Tardajos, 11km
체크아웃이 12시라 느지막이 일어나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럼 정말 한없이 늘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누워서 잠시 명상을 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그래도 늦은 출발이었다.
11시였으니.
나뭇잎에 물이 들어있다.
스페인에서 가을을 느껴본다.
부르고스가 크긴 한가보다.
계속 걸어도 마을 안이었다.
좋다!
걷다가 문득 보게 된 푯말.
과일, 빵과 커피가 순례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치명적인 아이가 있었다.
바로 '치또'라는 녀석~~
엄청 방정맞으면서도 귀여운 애교쟁이였다.
계속 만져달라고 보채며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나중에 녀석을 두고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보고 싶네, 치또!)
그렇게 가게에서는 바나나 한송이를 사서 출발했다.
점심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혜수랑 근처 까페테리아에 들어갔다.
주문한 샐러드.
근데 짜도 정말 너무 짜다..
'씬 살'을 외쳐야 하는데 오늘도 까먹었다.
소금 빼주세요~
개인적으로 먹다 보면 나는 혀가 마비되는..
허허.
배를 채우고서 마주한 큰 공원.
싱그러움을 느끼며 기분이 좋아진다.
그나저나 아직도 '부르고스'다.
그렇게 들어선 또 다른 공원.
'와, 나 여기 너무 좋아.'
가을 느낌 물씬 나고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에 조금만 더 이 풍경의 일부로 있고 싶었으나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부르고스 대학교 그리고 공원 옆에는 부르고스 대학교가 있었다.
이런 곳에서의 대학교 생활이라니 궁금하다.
나라면 매일 돗자리 깔고 누워 지냈을지도..
어느덧 부르고스도 떠나보낼 시간이 다가왔다.
Goodbye, Burgos.
마을에서 점점 멀어짐이 느껴지는 풍경이다.
기념의 브이 v 501km.
거리를 적고 나니 혜수랑 했던 대화가 생각난다.
매일 sns에 오늘은 몇 시간, 몇 킬로를 적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어디서 어디까지 총 몇 시간, 몇 km를 걸었다는 것에 큰 의미는 없다.
단지,
이 순례길 여정 중에 오늘은 어느 곳들을 지나치며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어디에서 머물며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기록하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도 수고했다'는 마무리의 의미로
수치적인 표시를 남기는 것일 뿐,
그 자체에는 그리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6시간을 걸었다고 해서
정말 쉬지 않고 6시간을 걸었던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더 많이 걸었다고 해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니니까.
기록하기 위한 D+18과 같은 의미다.
그렇지만 기록은 계속하고 싶다.
기록하지 않으면 금세 잊혀버리니까.
내가 지금 이 순례길 여정을 기록하듯이.
오늘도 각자의 속도대로 걷는 우리 점점 멀어져 가는 혜수가 보인다.
문득 오늘 혜수와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아쉽기도 하지만 서로의 여정이 어떨지 또 궁금해진다.
길을 걷다 보면 종종 이렇게 까맣게 시들어진 채로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있는 해바라기들을 만난다.
샛노란 해바라기를 마주했다면 얼마나 예뻤을까- 하다가,
사람들이 그래서 아쉬운 부분들을 다시 채우고자 순례길을 또 오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리고 나는 이 고개 숙인 해바라기들을 볼 때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것만 같아서 웃기다.
그런데 오늘은 문득,
이 새까맣게 시들어가고 있는 해바라기들이 대견하고 멋져 보인다.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또 아름답게 꽃 피우기 위해 웅크리기 시작한 거니까.
성장의 반동값.
한없이 웅크리고 수그러들었다가
그만큼의 힘으로 점프해 더 높게 올라가는 것.
지금의 나도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지 않을까.
이제는 습관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계속해서 보는 비슷한 풍경에 감흥이 좀 떨어졌지만, 이 여정을 남기고 기록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과 의무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걸으면서 깨닫는 것들을 남겨보고자 했던 건데
때로는 무언가라도 남기기 위해 깨달은 척하고 싶어지는 나를 본다.
됐다.
아무 생각 없이 걷기도 하자, 그냥.
오늘의 낙서.
Trust yourself. There are many reasons!
이유가 많든 적든..
아니, 애초에 이유가 필요한가?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내가 나를 믿는다는데
뭐, 어쩔 건가.
때때로 보게 되던 신발들.
그때마다 궁금했다.
놓기 위해 처음부터 챙겨 온 것일까,
걷다 보니 무거워 버리고 싶은 김에
올려놓는 것일까,
무슨 의미로 올려두었을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에게는 각자만의 의미와 사연이 있을 테지.
조개들이 두 팔 벌려 환영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멀리서 걷던 혜수와
이 귀여운 벽화 앞에서 다시금 발걸음이 닿게 되어,
덕분에 좋은 사진을 건졌다.
외국인들이 찍어주는 사진은 늘 건질게 없...
아무튼 다르다!
다시 또 끝없이 걷는다.
오늘은 혜수의 뒷모습만 보며 걸었던 것 같네.
순례길에서 만난 씩씩한 그녀!
따르다호스 드디어 나온 마을!
작은 마을이더라도 이렇게 꾸며놓은 것을 보면
초입에서부터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무언가 반겨주는 것 같아서,
괜히 응원해 주는 것 같아서.
그리고 이곳에서 혜수와 작별 인사를 했다.
서로 "잘 가~ 또 어디선가 보자~!" 하고 헤어졌다.
나 이런 담백함을 좋아하는구나.
순례길을 걸으며 새로운 나를 많이 발견한다.
너무 좋다.
오늘의 알베르게 도착!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또 한 번 머물러 보기로 했다.
그라뇬에서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좋았어서
자연스레 이곳에 멈추게 되었다.
간판에 발 그림이 너무 귀엽다 생각했는데,
쎄요도 저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걸 누가 다 직접 하나하나 그려 넣었다.
순례길 루트를..
마을의 이름과 마을 간의 거리까지 적혀있었다.
대단하다!
한국어도 있었는데 나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도로에 쓰레기를 던지고하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글의 위대함은 이런 것이지.
누가 봐도 쓰레기 버리지 말라는 소리라는 것을 다 알 수 있지!
:D
오늘은 손빨래를 했다.
찬물만 나와서 손이 좀 시렸지만,
아쉽게도 날이 흐려서 빨래도 다 잘 안 마르긴 했지만 괜찮았다!
그리고 오늘도 설마 혼자 자는 건가?! 하며 낄낄거리고 있었는데,
나중에 스웨덴 여자 한 분이 더 오셨다.
:-)
뭐,
오늘도 수고 많았다!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