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
의무로 글을 쓰는 듯했습니다. 매주 하나의 글을 올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일 줄 몰랐네요. 넘쳐나는 주제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왔는데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근래에는 기술 관련 글들을 페이스북에 올리다 보니 제 전문(?) 분야인 영업, 마케팅 관련 글들을 올리는 브런치 쪽은 글을 쓰는 것도 문제지만 주제를 찾는 것조차 힘들더라고요.
그래서일까요? 제가 요새 올린 글들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맘에 들지 않은 건 나름 몇 주 전부터인데 머가 문제인지 알 수도 없었고 시간도 많지 않아서 나아지겠지라며 글을 기계처럼 적기만 한 듯합니다. 시간과 여유가 없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회사 내에서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는 건데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네요.
지난 글들을 다시 읽어보고 있습니다만 맘에는 들지 않는데 어떤 문제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아주 예전에 적었던 글들과 비교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때에는 글을 쓰는 것이 정말 즐거웠었거든요. 의무로 쓰는 글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라고 확신에 차서 봤는데 ㅎㅎ 안타깝게도 거의 유사하네요. 단지 예전에는 정말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었나 봐요. 그걸 쏟아내듯이 글로 적은 듯하고요. 그런데 회사 내에서 혹은 제가 속해있는 커뮤니티에서 이제 어느 정도는 위치에 있다 보니 할 말 다하고 살아서인가, 할 말이 별로 없는데 쥐어짠다는 느낌만 있네요.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변화했습니다. 예전에는 혼자 고민하고 부딪혀보고 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제 역할은 비즈니스 관련 사내 최상위 결정권자임으로 혼자 무언가를 "처리"하는 것보다는 조직을 믿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이게 참 어렵습니다.
결재가 올라오기 전 중간 단계 즈음 다소 이상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데 그 이상함이 제가 일해온 방식과 달라서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이런 느낌을 무시할 수도 없기 때문에 팀리더를 불러서 물어보곤 하죠. 헌데 매번 이상함을 느낄 때마다 팀장을 불러대면 사사건건 참견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려워요... 그렇다고 제 역할을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으로 설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소 공격적일 수 있으나 전체 프로세스에서 병목을 찾아내고(일정표 체크만 스스로 해도 요런 건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병목의 해결을 제 역할로 두고 있는 상황이네요. 좀 더 정확히 하면 병목을 찾아내고 관련 인원들을 불러 원인과 해결책을 강구하게 하고 해결되는 것까지를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저를 힘들게 했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희는 반도체를 만듭니다. 반도체 자체는 계산기와 유사하기 때문에 어떤 계산을 할지, 어떤 기능을 만들지에 대한 부분은 그런 S/W를 만드는 기업과 협력해야 하는 비즈니스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반도체도 만들고 S/W도 만드는 회사도 있고 저희도 일부 S/W는 직접 만들기도 했고 하고 있습니다만 반도체 회사는 주로 반도체만 만들어서 공급하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합니다.(애플리케이션과 BSP 등의 이야기는 어려워서 생략합니다. 여기서의 S/W는 고객이 사용하는 최종 애플리케이션을 의미하기는 합니다).
저희는 반도체라는 하드웨어를 만들고, 파트너사는 그 위에서 구동하는 기능(소프트웨어)을 만듭니다. '개발 협력'이란 저희 반도체에서 그 기능이 오류 없이 완벽하게 작동하도록 맞추는 작업이에요. 이 검증이 끝나면, 카메라와 같은 완제품 제조사가 저희의 반도체와 소프트웨어를 패키지로 구매해서 최종 제품을 생산하게 됩니다. 이해가 되셨으면 좋겠네요.
비즈니스모델은 여러 경우가 있지만 주로 양사 모두 각자의 고객에게 이 솔루션을 소개하고 고객이 관심이 있으면 계약은 따로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혹은 한쪽이 한쪽의 영업권을 갖고 패키지로 공급을 하는 경우도 있고요. 이렇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패키지로 공급하는 형태를 솔루션이라고 합니다. 헌데 이 공동의 협업 모델에도 회사 사이즈에 따른 묘한 갑-을 관계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저희의 협업 모델은 저희가 소프트웨어 회사의 영업권을 가지고 solution provider로서 영업을 하는 모델입니다. 물론 저희와 S/W(소프트웨어) 회사와는 별도의 계약이 존재하고요. (실제로 이런 계약은 상당히 간단합니다. 해보면 정말 쉬운데 해보지 않아서 어렵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아요) 여하튼 이런 계약 관계 하에 저희가 고객을 데려왔습니다.
여러 번 미팅/컨퍼런스 콜을 진행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협업과 개발을 할지 입장차를 좁혀왔었고 필요에 따라 저희와 고객, 고객과 파트너사, 저희와 파트너사가 따로따로 미팅을 진행하기도 했었습니다. 헌데 뜬금없이 고객이 요상한 제안을 합니다. 고객이 기존에 사용하던 반도체(심지어 저희 경쟁사 제품)가 있으니 그 반도체에 파트너사의 S/W를 포팅하고 저희 반도체는 반도체 그 자체로 검토를 하겠다고 한 거죠... 단순히 보면 저희가 고객을 파트너사에 소개해주고 오히려 경쟁사의 반도체 쪽 영업을 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어졌습니다. 위에서 잠깐 설명했듯이 그 파트너사가 살짝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컴플레인을 걸었다가는 이 솔루션 비즈니스가 중단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이런 역학관계를 우리 파트너사가 잘 알아서 우리가 손해보지 않도록 역할을 해낼 것이라 믿는 방법이 있고 리스크를 감내하면서 일단 파트너사에게 컴플레인을 거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믿는 것은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 쉽지만 컴플레인을 걸려면 정말정말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고민고민하다가 컴플레인을 걸겠다고 마음먹고 메일 초안만 몇 번을 고쳤는지 모르겠네요. 인공지능까지 동원해서 뉘앙스 검토까지 했었죠. 결론만 말씀드리면 파트너사가 알아서 잘할 거야.. 걱정하지 마... 우리는 초심을 잃지 않았어. 우리가 너희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를 좀 더 믿어줘라고 하는 겁니다.
괜스레 부끄러워졌습니다. 좀 더 믿어볼걸... 10년을 넘게 일했는데... 성악설을 믿는 저로서는 여유가 없었던 걸까요? ㅠ_ㅠ 물론 저래 놓고 결과가 다르게 나올 가능성은 있지만 초심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아프게 다가왔었습니다.
글을 쓰겠다는 초심도 이리 금방 사라지는데 제가 이 일을 시작했을 때의 초심은 어땠었을지 기억도 나질 않더라고요. 초심을 잃는 과정이 아마도 있었을 텐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새로 초심을 만들어야 하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