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영업에 대하여 7

경험의 내재화

by 뽀야아빠

직접적으로 해외 영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떤 주제로 글을 쓸까를 고민하다가 요근래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차이"에 대한 부분으로 방향성을 정했거든요. 적다보니 얼라?라는 방향이 되버렸지만 중간에 해외 출장에 대한 부분이 있으니 제목은 해외 영업으로 가겠습니다. ㅎㅎ 게으름이겠죠?


나이가 들수록 사고가 굳어간다는 말, 주변을 돌아보면 어렵지 않게 공감이 되곤 했습니다. 뇌과학적으로도 경험이 축적될수록 뇌는 새로운 경로를 탐색하는 대신 기존에 익숙한 회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고 합니다. 살아온 세월이 오히려 미래의 방향성을 고착시키는 아이러니가 아닐까 합니다.


약 10년 전, 독일의 한 중소도시에 있는 카메라 회사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창립한 지 50~60년이 된 곳으로, 자체 기술력을 바탕으로 해외까지 진출해 나름의 자리를 잡은 탄탄한 회사였습니다. 독일은 미텔슈탄트(Mittelstand)로 불리는 이런 중소·중견 기업들이 자생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제도적 환경이 갖춰진 나라입니다. (이부분은 좀 검색해봤습니다. 제가 저 제도를 알리는 없습니다..ㅎㅎ) 그래서인지 그 회사도 스스로의 방식으로 충분히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저희는 신규 카메라 개발을 논의하기 위해 그 업체를 방문했습니다. 요즘 카메라는 이런 해상도가 필요하고, 이런 출력 스펙이 요구된다고 이야기했죠.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좀 애매했습니다. 단호했다고 할까요? 예를 들어 디지털 출력보다 내구성이 검증된 아날로그 스펙이 더 오래 살아남는다는 논조였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답답했었나봐요. 일기장에는 지들이 불러놓고 이야기를 안들으면 어쩌자는 거야? 그리고 어떻게 해외시장에 진출했지? 등 원망섞인 글들을 적어놨더라고요. 지금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랜 경험이 오히려 시야를 막고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 어르신들의 판단이 꼭 틀렸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한 분야에서 수십 년간 검증해온 자신만의 기준이 있었을 테니까요. 문제는 그 기준이 대화의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 중 어느 쪽이 맞냐는 오래된 논쟁이 있습니다. 이전 꼭지에서도 적었듯이 저는 어느 시기에 어떤 스킬이 필요하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의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해외여행을 하면 시야가 넓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행에서 무엇을 느꼈고, 그 경험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는가가 시야를 넓혀주는 것입니다. 그냥 다녀왔다면, 그냥 쉬다 온 것이지요. 해외 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회사에는 대리 시절부터 10년 넘게 해외 출장을 다니며 현지 업체들과 소통하고 문제를 해결해온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꼭 더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고요. 출장을 많이 다닌 것과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한때 1년에 200일 이상 출장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다른 동료들보다 훨씬 많이 해외를 다녔지만, 그것이 자동으로 시야를 넓혀주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경험들을 열심히 제 것으로 만들려고 한 것 같지고 않고요... 하루 하루 버텨내는 일정에서 그건 좀 어렵지 않나라고 변명은 합니다만 저 스스로에게 좀 가혹한 편이라 미팅 회의록을 쓰면서 반성 정도는 해봤습니다...ㅎㅎ 여하튼 그렇다면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한동안 고민해봤습니다.


결국 삶에서 그 경험이 차지하는 퍼센티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는 통역을 직접 맡아 현지인들과 일 이외에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했고, 그 경험이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남들과는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겠죠. 사람은 자신이 많이 경험한 쪽으로 형성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퍼센티지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내가 하는 경험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 한 번씩은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읽은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봤습니다. 철학책이나 인문학 책을 아무리 읽어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는 답답함, 저도 늘 느껴왔죠. 읽는 순간엔 뭔가 깨닫는 것 같은데, 돌아서면 지은이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책은 이렇게 이야기해줬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책을 읽으며 생각했던 경험 자체가 나를 바꾼다고. 결국 고민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남지 않습니다. 경험도, 독서도, 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꼰대는 게을러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렇게 겪었으니 너도 그럴 거라는 단정, 이것은 고민을 생략한 게으름의 결과입니다. 그 게으름이 쌓이면 사고가 굳고, 굳은 사고는 대화의 가능성을 닫습니다. 나이는 막을 수 없지만, 게으름은 막을 수 있습니다. 몸이 좀 않좋은데 이 글을 적으면서 "그래! 누워있는 거는 게으름이야"를 외치고 실내 자전거를 타려다 와이프님께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었습니다. 쪼끔은 쉬어야겠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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