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 온 뒤 행복지수 Feb 26. 2021

당신이 지나간 자리엔

자꾸만 잊어버린 것들과 잃어버린 것들이 떠오른다. 아끼던 회색 셔츠, 하얀색 니트, 선물 받은 반지, 어릴 적 애착 이불, 주변의 부러움을 사던 목걸이, 잘 나온 사진들 등등. 발이 달린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시로 없어지는 양말 한 짝, 실삔이나 머리끈 하나까지.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린 건지 기억도 안 날뿐더러, 이미 오래전 잃어버린 탓에 아쉬움만 남겨진 것들. 각자의 수명이 다한 물건들은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모습을 감추고 미지의 공간으로 떠나버리곤 한다. 때로는 도둑을 맞기도, 때로는 망가지기도 하면서. 사람들과의 인연만큼이나 물건들과의 인연도 아쉬움이 생겨나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어릴 적 사탕을 손에 집을 때부터 알게 되는 것 한 가지. 두 손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쥘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때론 아쉬워도 손에 쥔 것을 놓아야만 한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다가오는 새로운 것들과 떠나가는 아쉬운 것들의 굴레 안에서 계속해서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나의 기억이나 내가 살아가는 공간, 두 손이나 두 눈의 능력, 육체의 건강이나 정신의 온전함이 한정적인 것만큼이나 완벽함이나 영원함은 여전히 환상 속에 머무른다.


완벽하고 영원할 수 없는 삶이라면, 아쉬운 것들은 아쉬운 대로 보내줘야 하는 게 맞다. 발이 달린 양말 한 짝이나 머리끈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상황에 누구의 잘못을 탓할 수 없듯, 없어진다면 없어지는 대로, 사라진다면 사라지는 대로 보내줘야 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냥 특별한 이유 없이 바람이 슥 머리카락 사이로 지나가는 것처럼. 별 다른 부정적인 이유 없이 하늘에 먹구름이 흩어지는 것처럼. 양말 한 짝이 어느샌가 하나 둘 사라지는 것처럼. 그냥이라는 이유로 당신이 지나간 자리엔 무엇이 남을까. 비로소 그냥이 아닌 것들을 위해 그 자리를 비워두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시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