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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리 Mar 09. 2022

1년 뒤의 나에게 쓰는 편지

2월의 소소한 행복

새해가 되면 1월은 정신없이 흘러간다.

작심삼일이 된 몇몇 새해 계획은 나가떨어지고, 연도를 쓰는 칸에 실수 없이 '2022'를 쓸 무렵, '벌써 새해가 한 달 지났어?' 하는 2월이 온다. 하지만 여전히 추운 겨울이기 때문에, 두꺼운 옷은 해를 넘어서도 입고 있다.


벌써(아직도) 2월인가... 어? 2월이잖아?!


이맘때면 기분 좋은 일이 하나 떠오른다.

갑자기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책장으로 뛰어가 책 사이에 있던 편지봉투 하나를 꺼낸다.


편지를 읽을 때다!

1년짜리 편지를 모아둔 편지봉투. 돌아갈 수 없다는 스티커가 의미심장하다.


1년 뒤에 나는 뭘 하고 있을까나

때는 군 복무 중, 상병을 눈앞에 두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왔기 때문에, 1년 후 군대를 전역하면 바로 백수 신분이 되는 처지였다. 나는 남은 1년의 백수 유예기간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해야 할까? 나는 대학 전공을 살리지 않을 각오로 군대에 왔는데 말이다.

불확실한 미래가 답답하고 궁금했다. 분명 1년 후엔 어떻게든 뭐라도 하고 있을 텐데, 그게 뭘까?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겸, 편지 형식을 빌려 미래의 나에게 물어본다.


뭐라도 하고 있을 '1년 후의 나'는 '위대한 결정'을 내린 신과 같은 존재였기에, 편지는 답을 얻기 위한 일종의 기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다음 해, 전역을 바로 앞둔 시점에도 사실 결정된 건 없었다. 1년 동안 취미였던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긴 했는데, 해봤자 비전공자 백수 신분이었다. 나는 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까? 1년 뒤엔 회사원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1년 전보다 오히려 신앙심이 돈독해졌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드려본다. 1년 후의 '나'님,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시는가요? 제게 용기를 주시옵나이다.


그렇게 독실한 신자가 되다 보니, 일시적인 의식에서 정기행사로 변모했다.

나는 매년 2월, 다음 해의 내게 편지를 쓴다.




작년의 내가 쓴 편지

오랜 시간을 넘어 내게 도착한 편지다. 올해도 무사히 도착했구나!

가로로 4등분 된 편지지를 펼쳐본다. 늘 그렇듯, 가벼운 인사로 시작하며 작년 2월과 올해 2월의 시간이 만났다.

마치 네트워크 TCP 통신에서 handshake가 일어난 것처럼... 아니, 마치 1년간 벨소리가 울리던 전화를 드디어 받아 들고 "여보세요?"를 외친 것처럼!


무슨 내용일까, 가볍게 떨리는 마음으로 첫 줄을 읽어본다.


(중략)... (2020년은) 코로나의 한 해였어. 내년엔 마스크를 벗고 다닐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아아... 처음부터 슬픈 소식을 떠올려야 한다는 게 안타깝다.

2022년, 아직도 마스크는 필수란다. 믿기지 않겠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확진자가 10배 이상 많은걸!


맞다, 작년에는 1년이면 충분히 끝날 거로 생각했었지. 그때 즈음 백신도 나오려고 했으니까 말이야.

마스크를 벗고 다니냐는 질문은, 아직 끝맺지 못한 답변으로 넘긴다.


제주로 이사 갔지? 제주에서의 반년은 어땠니? 겨울은 잘 보냈어? 혹시 제주에서 더 지내고 싶니?
집은 어디에 구했을까, 차는 빌렸을까, 심심하지는 않을까, 육지에 있는 사람들과 아직 잘 지낼까, 사람들은 많이 놀러 왔을까?


작년 2월 무렵에는 제주도로 이사 가겠다고 마음먹고, 회사에 제주도 오피스 발령을 받았었다. 하지만 아직 이사 갈 집은 하나도 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제주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감히 예상하지 못했었다.


지금까지의 제주 삶을 돌이켜보면, 지난해에 상상했던 것보다 만족스럽다. 매일 아침 바다가 보이고, 20년 된 추운 집에서 벗어나 3년밖에 안 된 넓은 집에 살며, 주말엔 원 없이 바다와 산(오름)을 다닐 수 있고, 미세먼지도 적으며, 사내식당 밥은 싸고 맛있다.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기대는 초과해서 충족했다!


다만 심심할 거란 걱정도 맞았다.

제주 이사 초기엔 친구들이 2~3주에 한 번씩 놀러 왔다. 5~6팀이 놀러 왔어서 혼자 제주를 만끽할 틈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니 홀로 코로나 주말을 보내게 되는데...

심심함을 극복하기 위해 쓰레기를 줍고 다니고, 다이빙도 다니며, 올레도 걷는다. 온라인으로 육지 사람들과도 꾸준히 연락하려고 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심심함을 다스리며 괜찮게 사는 것 같다.

제주의 삶을 사는 2022년 현재
생각해보니 서른이네? 30대의 느낌은 어때? ...(중략)... 29나 30이나 얼마나 차이 나겠어. 그저 사람들이 정해 놓은 10진법의 숫자 하나가 변했을 뿐이잖아.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잖아. 소중한 30대의 시간을 즐기길 바라. 20대보다 지혜롭고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고 풍족한 순간. 나다움만 잊지 않길 바라.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음을 예찬하길, 여전히 자신의 길을 충분히 느끼며 걸어가길 바라.


작년과 가장 큰 차이는 나이 앞자리가 바뀌었다. 만 나이를 따지자면 아직 2년이나 남았지만, 구질구질하니 그냥 30대 하자. 빠르게 마음 정리하지 않으면 2년 뒤에도 "난 동안이니까 아직 20대야"라든지, "난 아직 20대처럼 생각하니까 괜찮아"처럼 계속 미루기만 할 것 같다. 아 물론 동안이긴 하다. 어디 가서 30대라는 말 안 듣...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가 아이유다. 아이유가 나랑 나이가 같아서, 아이유가 나이를 곱씹는 노래를 내면 공감이 많이 된다. 아이유는 서른 살을 설레며 기다렸다고 하는데, 그 말이 좋았다. 다들 20대를 아쉬워하며 갑자기 만 나이를 따지고 30대가 되는 걸 환영하지 않는데, 아이유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간을 소중히 껴안는다고 느꼈는데, 그녀의 철학이 매력적이었다. 나도 그렇게 30대를 맞이하고 싶었다.


20대의 끝자락에서 나는 자서전을 썼다. 자서전을 쓸 만큼 대단해 보이는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내 삶을 정리하고,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도전이었다. 내가 무엇을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아픔과 추억이 있었는지, 내 철학은 무엇인지. 1년 반의 과정을 거치니, 나 스스로한테 당당해졌다.

덕분에 나를 더 사랑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고 30대가 시작됐다. 나는 20대보다 30대가 더 행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편지를 받고 가만히 있으면 예의가 아니다.

꼭 답장을 써야지!


내년의 내게 쓰는 편지

2023년의 나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그 세계의 내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끊임없는 통화 연결음이 뚜-- 뚜-- 이어질 것이다.

늘 그랬듯 간단한 인사로 시작해볼까? 아니다, 올해는 답장처럼 시작해보자.

2021년의 나는, 2022년의 내게 제주의 삶은 어떻냐고 물어왔어. ...(중략)...
그땐 매일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걸 잘 상상하지 못했지. ...(중략)... 일상의 행복도가 확실히 증가한 듯해. 물론 친구가 주변에 별로 없다는 게 흠이지. 2023년의 나는 제주 친구 좀 만들었으려나?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다.

아, 그보다 코로나 끝났어? 마스크 끼고 다니나 설마?

설마!


제주에서 더 있을 거니? 아님 육지로 돌아갈 계획이야?
올레는 많이 걸었으려나? 다이빙은 많이 했고?
매년 묻지만, 연애는 하니? ...(중략)...
두 번째 책, 이제 슬슬 준비해야 않겠니?
ㅋㅋ 부담 주려는 건 아니고...

순수한 마음으로 궁금한 점을 써 내려 가는데, 명절날이 따로 없다. 2023년의 내가 올해의 나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 역으로 잔소리를 하고 있다. 용돈이라도 주고 그런 말을 해야지?


제주에 오면서 2년은 있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제주가 마음에 들면 1~2년 더 있는 것도 염두에 뒀었다. 제주에 온 지 10개월 차로서, 아직은 더 있고 싶단 마음이 드는데, 과연 2년을 거의 다 채워갈 땐 어떤 생각일까?


올레길 패스포트를 사면서, 제주에 있으면 올레는 다 걸어야지 싶었다.

비싼 다이빙 슈트를 손을 벌벌 떨며 결제하면서, 다이빙 열심히 해서 본전 뽑아야지 싶었다.

솔직히 이건 해줘야 한다. 하지만 연애는 잘 모르겠다. 맨날 형식 치레로 적어놓는 말이다. 이 이야기가 빠지면 편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결과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형식이니까!

올레 패스포트의 어떤 한 페이지. 21코스까지 다 걸을 수 있겠지?


두 번째 책은 브런치의 글을 모아다 제주의 삶을 담은 에세이를 준비 중이다. 첫 번째 책은 자서전이긴 한데, 비매품, 한정판, 비공개용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표지와 내지 편집, 구성, 교열 등 모든 것을 내가 혼자 하여서 책 퀄리티도 높지 않다.

하지만 두 번째 책은 꼭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다. 목표 기한은 제주를 뜨기 전이며, 들어갈 내용은 내년 상반기까지 완성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2023년 2월엔 어느 정도 준비하고 있어야지? ^^


어떤 고민을 하고 있니? 뭘 하든 괜찮고, 또 내가 응원하는 거 알지?
어차피 인생 한 번이고, 내 선택으로 결과가 정해지는 것도 아니야.
인생에 정답 없고, 답 맞춰줄 사람도 없어. 그냥 사는 거지.
허무해 보일지라도, 그 순간의 행복은 늘 도사리고 있으니 놓치지 않고 한껏 느끼길 바라.
수고했고 힘내고 사랑해.

편지의 마무리는 중간과 다르게 응원해주면서 끝맺는다.

처음에 나 자신과 이야기 나눌 때는 오그라드는 "사랑해" 같은 말은 못 했었다. '다 아는데 표현해서 뭐해~ 나 스스로한테 하는 말인데~' 누가 경상도 사람 아니랄까 봐.


그러다 '정신수련'한다는 셈 치고 심호흡 크게 하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분명 주변에 얘기를 엿듣는 사람이 없는데 수련하는 것처럼 쉽지 않았었다. 아직도 살짝 낯간지럽지만, 이젠 최대한 많이 말해주려 한다.



올해 2월도 잘 지나갔다.

어떤 시간이 내 앞에 펼쳐질지 궁금하다.

편지를 읽을 순간이 궁금하다.


다음 이 시간에...


멀리 1년 후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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