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체득
잘 들었어? ㅎㅎ 아직 어려서 이해가 잘 안될텐데
그는, 어제 있었던 '그의 말씀'이 인상 깊었다는 나의 아부성 멘트에, 역시나 '그'다운 말을 했다.
나와 멀지 않은 자리, 그는 <김부장 이야기>를 보고 너무 공감이 된다는 감상평을 그의 아랫사람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본 적도 없지만, 대충 40-50대의 대기업 중추 직원이 겪는 일상 드라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나보단 윗 세대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당연히 "꼰대" 아저씨의 드라마겠거니, 하고 예고편을 넘겼던 기억이 난다. 헌데, 그게 공감되었다고? 얼추 넘겨 들은 이야기에, 짧은 웃음이 픽- 나왔다.
나도 나름 생각이 많고 깊은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면, 가 듣고 감탄하는 이야기보다는, 내 말에 놀라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개 내가 언젠가 이미 한두번 쯤 들어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가끔 나를 흠칫하게 하는 인사이트가 있다면, 나는 그 이야기를 되뇌다 다른 기회에 '마치 깨달은 것처럼' 그 배움을 전한다. 청중의 살짝 눈이 커지는 반응이 보이면, 성공이다.
그래서일까, 웬만큼 내공이 깊어 보이는 사람이 아니면, 다른 사람의 가르침은 삐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저 사람은 저걸 얼마나 고민했을까?' '저 깨달음의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내게 구태여 노력하면서 가르침을 전하려는 사람에게 종종 냉혹한 시선을 보내며 평가한다. 당연히 평소에 호의적인 마음을 갖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 '가벼운' 가르침에 힘껏 바람 날려 흔들어 댄다.
첫 만남 때부터, 나는 그와 좋은 관계일 수 없었다. 나는 한창 회사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응축되다 못해 폭발하는 시기였고, 그는 '사측'이었다. 이후 그는 내 업무보고를 자주 듣게 되었고, 나는 조금만 아는 게 나오면 '아는 척'하는 그가 싫었다. 나는 효율적인 회의를 매우 지향하기 때문에, 그의 지식자랑 시간이 되면 두 눈의 초점이 나가버리고 '여긴 어디, 나는 누구'를 시전했다. 그렇게 여러 차례의 초연해진 시간이 지나고, 그는 떠나갈 때가 되어, 자기 아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멋진 마무리"와 함께 떠났다.
나와 감성이 맞는 친구가 추천해준 <안녕이라 그랬어>는 도서관 예약자가 6명이었다. 한 사람이 최대 2주 동안 읽을 수 있으니, 그 책을 읽으려면 3달은 더 기다려야 했다. 책은 다 읽으면 다시는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나는, 책을 사지 않는다. 자연스레 도서관은 나의 애착장소가 되었고, 내가 읽는 책은 곧 도서관에 있는 책이었다.
그렇게 김애란 작가의 신작의 인기가 시들해지길 기다리다, 우연히 우리집 책장에 있는 <두근두근 내 인생> 책을 발견했다. 일 년 전, 대학 동아리 친구들과 간만에 모여 "선물 교환식"을 진행했는데 한 친구가 중고책을 선물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소설을 읽지 않지만, 친구들 하나하나한테 책을 선물하려고 준비한 마음이 담긴 책이 사뭇 좋았는데. 그렇게 '언젠간 읽어야지'가, 작가가 누군지 깨닫게 되는 1년 동안 책장에 오랫동안 쉬게 되었다.
눈물 줄줄 흘리며 소설을 완독했을 때, 나를 덮친 건 죽음의 무거운 미련과 가슴 아픈 이야기 뭉탱이들이었다. 그 쏟아지는 감정의 폭포수 사이로, 딱 하나 마음에 와닿은 이성적 깨달음이 하나 있었다.
음, 세월이 내 몸에서 기름기 쪽 빼가고 겨우 한줌, 진짜 요만큼, 깨달음이라는 걸 주는데 말이다, 그게 또 대단한 게 아니라에요. 가만 봄 내가 이미 한번 들어봤거나 익히 알던 말들이고, 죄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며 행복의 기준을 외부에서 찾게 된다면, 나는 내 인생의 고삐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 된다는 '사실'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5년도 더 된 이야기 같다. 하지만 고삐를 다른 사람에게서 조금씩 뺏어온 지는, 그것이 얼마나 후련하고 내 억압을 벗겨내게 되는 건지 안 것은 몇 주 되지 않았다. 굳이 단어카드를 찾아 연결하자면, 이해가 체득이 되는 오랜 과정이었다.
깨달음이란, 몰랐던 게 아니라, 점차 가까워지다 나에게 닿은 것이다.
꼰대 아저씨의 "사람이 중요하다", "아무리 고민해도 다른 사람의 말이 이해가 안되면, 그 사람이 말을 못한 거다", "일하는 것과 일하는 척은 다르다" 같은 말은, 내가 그렇게 가벼이 여길 말이 아닐 수 있다. 내가 단지 그를 자기중심적 사고라 폄하하는 것은, 감히 '깨달음이 닿지 않은' 사람의 어린 시선일 수 있다. 그가 내게 남긴 "어려서 잘 모를텐데" 발언은 끔찍하지만, 그가 전하고 싶은 의미는 고결할 것이다.
언젠가 다시 내게 닿을 문장을 하루하루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