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거 봐. 난리났다.”
친구에게 메신저로 연락이 온 것은 오후 9시 30분경. 팀 회식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간다던 친구가 본인 팀장님이 회식을 즐기는(?) 사진을 보내왔다.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자리를 돌아오며 함박웃음을 띤 그 모습.
“와, 이 사진 너무 행복해 보이는데?” 내가 말했다.
“그래, 얼마나 행복하겠냐. 본인을 위해서 아랫사람들이 끌려와서 이렇게 같이 놀아주는데. 정말 지겹다 지겨워.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친구가 답했다.
나는 그날 친구가 보내준 그 사진 한 장에 퍽 감명을 받았다. 약간의 술과 그 후 노래방에서의 가무(?)에 정말 세상 행복한 미소를 띤 친구네 팀장님은 나에게 ‘행복이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요즈음 나는 행복과는 오히려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아니, 거리가 멀어져 있다기보다는 내 스스로 행복을 외면하고 ‘나는 행복하지 않다.’ 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 만족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나의 불행을 내 스스로 초래해 왔다.
행복으로의 거리를 스스로 멀리 할수록, 오히려 그 좌절감은 나를 일어설 수 있게 만들어줬다.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참으면, 미래에 더 큰 행복이 찾아올 거라는 생각에. 현재를 인내하는 것만큼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과연 그 인내는 행복을 보장할 수 있었는가?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미래의 행복이 다가올 무렵에, 나는 또 다시 미래의 행복을 기대하며 다가온 행복을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더 큰 행복이 나를 찾아올 거라는 기대감으로.
그 끝에, 결국 나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과연 나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취를 했음에도, ‘왜 내 인생은 항상 대박이 없고 중박에만 머물러야 하는가?’ 하며 괴로워했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는 “OO아, 인생에서 중박만 치는 것도 얼마나 힘든 건지 아니?”라며 나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지만, 내가 나에 대해 갖고 있는 기대감만큼 나는 언젠가 다가올 나의 커다란 행복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당장 나에게 다가온 현재의 행복을 외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지가 벌써 30년이 넘었다. 항상 주변에서는 ‘인내해라, 겸손해라.’ 하는 조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그런 사람들은 행복을 마주할 수 있는가? 나는 이미 내게 다가온 행복을 마주할 용기를 잃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직장과, 등 붙여 뉘일 수 있는 집, 주변에 나를 사랑해주는 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지금의 행복이 풀어주지 못하는 나만의 갈증에 괴로워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단순히 소주 몇 잔과 노래 한 곡으로 행복할 수 있는데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기분이 좋기 위해 마신 술은 오히려 이런 나를 자괴감으로 몰아갔고, 결국 나는 현재의 어느 것 하나에도 만족할 수 없고 단순히 다가올 미래의 행복만을 그리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언젠가 친구에게 ‘우울한 개구리’로 유명한 페페 밈(meme)의 사진을 보낸 적이 있었다. 옆에선 백만장자로 웃고 있는 개구리가 있고, 한 쪽에선 팝콘을 튀겨 가며 즐거워하는 사진 속에 우울해하는 한 마리 개구리. 친구에게 그 그림을 보내며 ‘내 인생’ 이라는 짧은 메시지를 함께 보내자, 친구는 “팝콘 먹고 있는 게 너임?” 하고 반문했었다. 그만큼 남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행복한 삶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행복을 꾸준히 부정해왔으며, 이젠 그런 것은 습관이 되어 쉽게 고쳐질 생각을 않는다.
친구가 보낸 행복해하는 팀장의 모습은 나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나는 과연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임에도 나는 계속해서 무엇인가 더 바라며 당장의 행복을 미뤄온 것은 아닌지. 내 행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해서 부정해 온 것은 아니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