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타티아스 혁명과 수전절(하누카)

by 광규김

알렉산더 사후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의 나이로 너무나 이른 삶을 마감한다. 강력한 군사력에 의한 합병으로 이룩된 헬라 제국은 거대한 정치적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대왕의 사령관 곧 디아도코스의 다툼으로 제국의 통일은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

img.jpg 디아도코스



프톨레미 왕조의 온건한 헬라화 정책


이 중 팔레스타인에 가장 먼저 영향을 미친 곳은 바로 이집트에 주둔하던 프톨레마이우스 총독의 세력이었다. 프톨레미 왕조의 온건한 헬라화 정책 아래에서 이스라엘과 유대교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의 종교와 제사 그리고 율법과 성전은 인정을 받았으며, 알렉산드라에서는 72명의 장로에 의한 최초의 헬라어 성경 역본인 “셉투아긴타”(70인경)이 번역된다.


그러나 기원전 315년 시리아에 세력을 두고 있던 안티고누스와의 싸움에서 프톨레미가 패배하고 팔레스타인은 안티고누스의 세력하에 들어가게 된다. 안티고누스는 옛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거의 얻을 수 있었으나, 알렉산더의 나머지 총독들이 공동으로 그를 대적하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남부의 영토는 다시 프톨레미의 손에 들어간다.


이후 약 백년간 팔레스타인은 유화적 헬레니즘 국가인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게된다. 알렉산더와 마찬가지로 프톨레미 왕조는 이스라엘 제의 공동체에 대한 간섭은 하지 않았으며, 산헤드린은 유대 최고의 권력 결정기관으로서 그들의 세속과 영적인 문제를 결정했다.


셀류코스 왕조의 지배와 막가비 혁명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의 시대. 팔레스타인은 이집트로부터 셀류코스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유대인들은 전쟁의 정세가 시리아의 쪽으로 기우는 것을 보고 셀류코스의 편에 가담하여 자신들에 대한 호의적인 대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셀류코스 왕조는 프톨레미 왕조와 달리 강경한 헬라화 정책의 국가였다. 그들의 급진적 헬라화 정책과 민족간 결합 시도는 유대인의 반발을 낳았으나 당시 예루살렘의 사제들 중 많은 이들은 헬라주의를 추종하는 이들이었다. 대제사장은 셀류코스 왕조의 명령의 실행을 거들었고, 세금 징수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안티오코스 4세의 비극


기원전 175년.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가 집권했을 무렵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은 오니아스였다. 그는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제사장이었으나 내부에는 그의 동생 요수아와 헬라화 추종자들이란 반대세력이 존재했다.


오니아스의 동생 요수아는 자신의 이름을 희랍식 이름인 ‘야손'이라 개명하고 세금을 인상하여 시리아에 봉납한다. 종국에는 형의 대제사장직을 빼앗아 갔으며, 오니아스는 몇년 후 안디옥에서 살해당한다. 그러나 야손의 시대는 길지 않았다. 야손의 대제사장 취임 3년 후 메넬라우스라는 이가 야손보다 더 많은 금액을 셀류코스 왕가에 바치고서 대제사장직에 취임하였으며, 이 성직 매매로 인해 대제사장직은 매매와 정치의 대상으로 전락하게된다.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는 전쟁으로 국고를 소비하였고, 이에 예루살렘 성전을 강탈한다. 이때 성전의 기물과 촛대 그리고 번제단 등을 빼앗긴다. (마카베오 1서. 1장)


재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에피파네스 4세는 강제적인 헬라와 정책을 시행했으며, 기원전 167년 예루살렘의 번제단엔 제우스에게 바치는 희생 제물이 드려졌다. 또한 율법에서 부정하다 말하던 돼지들이 희생 제물로 봉헌되며 이러한 성소에 대한 모독은 마치 유대인들에겐 묵시록적인 표징으로 보였을 것이다.


다니엘 11:31

31.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


다니엘 12:11

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이렇듯 신앙 공동체의 위기는 언제나 묵시 문학적 배경이 된다. 일련의 참상은 마치 유대교의 존립의 위기와 같이 보였을 것이다. 박해와 고난은 사람들의 입에서 종말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게 했으며, 여호와의 심판과 그의 다스림의 회복을 갈망하게했다.


성전을 바알을 위한 신전으로 변질시키고, 매춘을 알선하며 부정한 짐승을 봉헌한다. 강제적 헬라와 정책과 유대교에 대한 박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카베오 상 1장 41절엔. 할례를 하면, 그 아들의 목을 베어 어머니의 목에 걸고 마을을 돌게 했다는 어머니와 7형제의 순교 이야기가 나온다.


img.jpg 안티오코스 4세의 박해



그러나 시골에서 헬라화에 저항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던 경건한 유대인의 운동이 일어났다. 바로 이들을 바리새파와 에세파의 기원이된 하시딤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셀류키드 왕조가 모데인 지역까지 와서도 이방 제물 봉헌을 강요하였고, 마타티아스와 그의 다섯 아들은 이방 제물을 바치려던 유대인과 왕의 관리를 죽여버린다. 이 행위로 인해 이들은 광야로 숨었어야했는데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이들을 중심으로 모여든다. 이들은 이방 신전을 파괴하거나 배교한 유대인을 처벌하기 위한 군사적 행동을 벌였다. 얼마뒤 마타티아스가 죽자 마카비 곧 망치란 뜻의 별명을 가진 셋째 유다가 지휘권을 이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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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달력


에피파네스는 파르티아 유목민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군대를 동쪽으로 보내야만했고, 이 병력의 공백을 이용하여 반란에 성공할 수 있었다.


기원전 164년 12월 25일. 제단이 새롭게 봉헌되고 성전을 수복한다. 그리고 이 날을 신약 성경은 하누카 곧 ‘수전절’이라고 부른다. (요한복음 10장 22절 ~ 24절)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요한복음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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