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평안이라는 주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영상을 촬영하고 곡을 만들었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엮어낼 글을 쓸 계획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쉬운 작업은 아닌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글을 쓴다.
앞으로 이어질 글을은 이 음악을 들으며 읽으면 더 와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함께 남겨본다.
“저는 평안하지 못해서 평안하라고 말합니다.”
“그 것은 마치 불면증을 앓는 환자가 ‘잘자 좋은 꿈 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커다란 진심이 담긴 고백입니다.”
한 설교의 자리에서 그곳의 공동체원들에게 즉흥적으로 전해준 문장이었다.
내 마음은 평안하기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에 간절했다.
예수를 믿어도 내가 살아가야할 세상은 그 앞에 그대로 있었다.
사망의 골짜기는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으며 나는 그 한가운데로 지나야한다.
그것이 시편 23편의 저자의 고백이자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구하러 가시던 중
만난 12년간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의 상황이었다.
그녀의 육신의 병은 나았으나 그녀는 자신을 12년간 멸시하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예수는 그런 그녀에게 복음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딸”이라고 부르며 보내셨다. 그 딸을 기다린만큼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야했던 마음이 편했을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한가지 말씀을 하셨다.
“평안히 가라”
평안과는 관계가 멀었던 최후를 향해 달려가던 그의 사역의 도상에서 그는 언제나 평안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가 언제가 그러했듯 그는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비극은 그의 따뜻한 이야기가 있었기에 각자의 인생에 와닿았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마주해야했던 세상은 가파르고 고단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서 그녀가 마주해야했던 세상은 완전히 뒤집히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게된 모든 이들의 고백과 상통하는 세계관의 변화였다.
나를 압도하고 나를 죽게하는 사망의 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여호와가 지으신 세상으로, 나를 사랑하는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골짜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그림자 곁으로 드리워 서있는 어두운 세상이란 것은 한치도 틀림이 없었다.
믿음은 그런 것이다. 세상을 바꿀 수 없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뀌게 한다. 때문에 기독교는 세계를 바꾸는 종교에 앞서 세계관을 바꾸는 종교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종교가 가진 큰 힘이자 종교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무능함이라 말할 수 있겠다.
평안은 그러한 역설이 있다. 피할 수 없는 세상에서 평안을 노래하는 일은 자칫 제정신을 놓은 사람 처럼 보이기 쉽다. 평안하라는 축복도 이와 같다. 축복이란 진심이 담긴만큼 아픈 법이다. 축복으로는 바꿔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평안히 가라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마냥 편하진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딸아. 이제는 평안히 가거라. 다른누구도 아닌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누구도 도울이 없는 여인 과자신을 살려달라 했던 축복 받는 회당장의 딸 바로 야이로의 딸. 극명하게 대조되는 장면을 통해 성경은 말하고 있다. 부모의 사랑을 통해 달리다굼의 기적으로 소녀는 되살아났고, 평안히 가라는 아버지의 말씀으로 여인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믿음이라야 그 영혼을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기다리고 계신다. 12년이 넘도록 피를 흘리며 고통과 멸시와 핍박 중에 있었을 당신을. 신에 버림 받았단 저주와 혐오 속에 군중들을 스치지도 못하고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두려워하며 그 옷자락만을 겨우 잡을 수 있었던 절박하고 무력한 당신을 말이다.
딸아. 이제는 평안히 가라. 세상에서 가장 무력하게 보이나 세상 전부를 바꾼 이 한 문장은 지금도 남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많은 이들의 도움과 영감이 있었기에 적을 수 있는 이 글과 활동이었음에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