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이 지난 시간 함께 살았던 동기와 오랜만에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눴다. 얘기를 마치고서 동기는 내게 허무하다 그랬다. 기말시험을 앞두고 차한잔하며 담소를 나눈 끝에 다달은 결론이었다.
“공부를 하고 나면 이걸 어디에 쓰나”
현장과 학계의 괴리는 크다. 사역을 해야하는 신학생에겐 학교에서 배운 내용대로 설교를 할수도 없었고, 교회에서 배운대로 공부를 할수도 없었다. 경건과 학문이 다를때 생기는 괴리로 학우는 내 앞에서 괴로워했다.
뭐긴 성도들 앞에서 아는척 하는데 쓰는거지. 열심히 신학을 배운게 신앙이 뜨거운건 아니라는 오해가 낳은 현실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대답했다.
“아는척해서 뭐하는데”
뭐긴 아는척 하라고 돈주고 쓰는건데. 알아야하는게 우리의 일이고 알려야하는게 우리의 소명이지. 예수를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가 궁금했고, 예수를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를 알기 위해 노력했다. 기도탑에 있지 않은 시간엔 도서관에 있었고, 기도하는 손을 잡지 않을때 내손엔 책이 들려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할만큼 아는게 얼마 없다.
특별히 신앙과 신학을 구분짓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내 안의 사랑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간혹 신학을 하겠다는 후배님들을 만날때 나는 말한다.
예수를 사랑하는 만큼 공부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만큼 공부한다. 귀한 이들에게 주는 만큼 정성을 다해 준비해야한다. 질문과 도전에 믿음이 부족하다는 무책임한 말로 도망치는게 아니라 두려워하지 말고 응대해야 한다. 성도와 세상이 가져오는 문제에 대해 아무런 고민 없음이 탄로나는 순간 사역자의 근간이 추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