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번영의 신학이 개신교를 휩쓸고 지나간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잔재가 남아 교회 공동체에게 불순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능력주의적인 축복의 말들이 왜 잘못된 것인지 커다랗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대는 번영의 신학에 종말을 고하고 있다. 매번 발표되는 통계는 기독교가 위기에 봉착해있으며, 이것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흥기를 맞이했으나 이제는 죽음을 앞둔 육신을 이끌고 전진하는 산송장의 무리가 되었다.
이단을 이단이라 말하지 못했고, 복음을 복음이라 말하지 못했다. 여호와 신앙이 가지는 역사에 대한 회고와 율법이 가진 강력한 윤리적 제언을 무시한 채로 물질적 복리를 추구하기 위한 제의를 드렸다. 그러나 초기 이스라엘 사회에 전승되던 절기는 그들의 역사를 회상하기 위한 것이며, 그들은 계명에 구속되고 그 안에서 자유로웠다.
이러한 기복의 신앙은 오히려 당시 이스라엘 주변 세계를 이루던 이방 종교들에서 찾아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자연현상과 자연계의 힘을 신격화했으며 그들 왕조와 전쟁의 정당함을 위해 곧 지배층의 다스림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서 그들의 신을 이용했고 그들의 예배를 올렸다.
다스림의 논리를 대변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유복함을 논증하기 위해 필요한 종교는 여호와 신앙과는 무관한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복음이 말하는 다스림 곧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보다 낮은 자와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이 되었으며, 예로부터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 같은 사회적 취약계층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해야 하는 물리적 교회 공동체는 신의 일을 대리하며 그 아름다움과 복음의 논리를 변증 하기 위해 존재해야 했다.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따라 그리고 자신의 이윤을 따라 움직이며 편 가르기를 시작한다. 지극히 정치적인 징벌과 정죄는 이미 그 정당성을 상실하고서 대중의 조롱과 멸시를 받기에 이르렀다. 아니. 이젠 대중은 우리에게 관심조차 없으며 이따금 들려오는 수치스러운 소식에 그들의 조소를 던질 뿐이었다.
번영의 종말을 스스로 초래한 결과였다. 재앙적인 현실이 가진 파급력은 이미 사람들로 하여금 제도 종교를 떠나도록 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는다 말하는 공동체를 혐오하는데 중요한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번영을 추구한 신앙의 종말은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해가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미 죽은 육신 위에 옥합을 깨며 향유를 발라 그 악취를 숨기듯 향기롭다 말하는 예배는 교회의 치부를 철저히 무시한 채로 영광을 노래하고 있다.
영광을 받을 이는 어디에 계신가. 적어도 제도 종교의 번영을 향한 염원 속에 계시진 않을 거 같다. 이렇게 나의 개탄스러운 짧은 소고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