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어떻게

by 광규김

세상사람 모두가 실리를 따라서 살 때, 내가 먼저 섬기고 대신 죽겠다고 말하는 것이 호구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때 나는 한 설교에서 말했었다. <자격>이란 주제로 전한 설교였다.


“주인이 호구인데! 어떻게 종이 호구가 아니겠습니까?”


도마의 최후보다 더한 믿음이 있는 사람 아무도 없으면서 믿음 없는 도마라 말하는 이들에게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적당히 현실에 타협하고, 적당히 불의에 침묵하며, 적당히 이웃의 아픔에 침묵하는 이들이 어떻게 그보다 믿음이 있다 말할 수 있겠느냐고.


선택적인 아가페, 반쪽도 되지 않는 사랑을 하며 살지 않느냐고.

나는 한치도 되지 않는 자격을 가지고서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종이다.

그래서 언제나 별거 아닌 것으로 남기를 바랬다. 나는 해도 달도 아닌 은은한 별이 되어 이름 없이 밤 하늘에 빛을 수놓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사느냐 묻으냐면 참 부끄럽게 살고 있노라 말하고 싶다.

무엇하나 제대로 사랑하며 섬기지 못하고, 마음을 정하지 못한채 여전히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심 곧 믿음의 첫 사랑이란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다. 나는 초심은 당연히 잊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떠나보내고 매순간 새롭게 마음을 다잡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주인이 그토록 외치며 죽어간 존귀한 가치와 생명들을 나는 조금이라도 지키고 있었을까 생각한다. 신학이란 이토록 무력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불꽃을 마음에 심어준다.


종이란 주인을 따른다. 단 한걸음도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앞서갈 수 없고, 주인이 정한 길을 따라 걷는다. 때문에 많은 사역자들이 스스로를 종이라 부르며, 많은 이들이 우리를 종이라 불러주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소리 없이 주인을 따르라… 그런 의미로서 말이다. 누구도 그를 제대로 따르지 못하면서도 종이란 말을 들으면 그 마음에 괴로움이 있기 마련이겠다. 그 가책조차 없는 파렴치함이 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 또 하루를 살아간다.


종은 주인의 죽음을 답습한다. 그의 삶의 자취를 따라야만 얻을 수 있는 그 최후를 따라간다. 그것은 마지막에 발길을 돌린 베드로의 죽음과도 같겠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매일 새롭게 우리가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길을 잃어벌리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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