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딛고 선 지구라는 시한폭탄

브뤼노 라투르와 인류세, 무한 성장이 빚어낸 생태의 슬픔

by 광규


우리가 딛고 선 지구라는 시한폭탄

브뤼노 라투르와 인류세, 무한 성장이 빚어낸 생태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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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경계가 무너진 지 오래입니다. 사계가 뚜렷한 우리나라는 이제 어디가서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한겨울에 때아닌 폭우가 쏟아지거나, 봄꽃이 피어야 할 자리에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이면 우리는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며 불안한 탄식을 내뱉습니다.


과거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그저 자연의 섭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었지만, 이제 우리가 마주하는 붉은 태양과 거친 비바람 속에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길한 경고음이겠습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가장 눈부신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정작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푸른 별은 열병을 앓으며 서서히 숨을 거두어가고 있습니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이름 모를 생명체들이 소리 없이 멸종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이 비극적인 다큐멘터리 앞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스스로를 안전한 관찰자라고 위로할 수 있을까요.




인류세, 탐욕이 지질학적 흔적이 된 시대

과학자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키워드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릅니다. 소행성 충돌이나 화산 폭발 같은 거대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스러운 활동' 그 자체가 지구의 지질과 생태계를 영구적으로 뒤바꿔놓은 무서운 시대라는 뜻입니다. 콘크리트와 플라스틱, 닭뼈와 방사능 물질이 훗날 우리 시대를 증언하는 지층의 화석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서글프고도 뼈아픈 역설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그저 인간의 생존과 편리함을 위해 마음껏 가져다 써도 되는 무한한 자원의 창고쯤으로 여겨왔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에게 어머니라 불릴법하지만, 우리 불효자들은 어머니를 독점하고 이용하다못해 파괴하려 합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라는 자본주의의 주술에 걸려, 경제 성장이라는 우상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해 왔지요. 고삐풀린 욕망은 아무런 도덕적 반성도 없이 수치화된 경제적 가치를 위해 만물을 소비합니다. 하지만 이 유한한 지구 위에서 '무한한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오만하고도 위험한 환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실패한 이념을 종교마냥 신봉해줄 마음이 없습니다.




기술로 위기를 덮으려는 생태근대주의의 기만

일각에서는 우리가 직면한 이 기후 위기마저 눈부신 '기술 발전'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대기 중의 탄소를 포집하는 거대한 기계를 돌리고, 우주로 나아가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이른바 '생태근대주의(Ecomodernism)'적 낙관입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그의 저서 『지구로 착륙하다』에서 이러한 오만을 맵차게 꾸짖습니다. 그는 근대인들이 스스로를 자연 위에 군림하며 언제든 다른 별로 떠날 수 있는 초월적 존재로 착각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라투르는 우리에게 공중을 부유하는 환상에서 깨어나, 흙투성이인 이 '지구로 다시 착륙(Down to Earth)'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파헤쳐 놓은 이 거대한 시대의 공백 앞에서는, 알량한 기술적 미봉책이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를 뿌리째 뒤집는 근원적인 돌이킴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시기의 늦고 빠름을 때질 때가 아닙니다. 또한 이 돌이킴의 효용성을 따질때도 아니지요. 이대로 가다간 파멸은 확정적일진대, 그 앞에서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욕망으로 인하여 파멸을 초래한다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애초에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두고 주인행세를 하다가 자멸해버린 모습은 우습고 한심할 뿐입니다.




인간 너머의 생명과 손을 맞잡는 연대

지구는 결코 인간만을 위해 창조된 무대가 아닙니다. 이름 없는 들풀 한 포기,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철새의 날갯짓, 그리고 고요히 흐르는 강물 속에도 우리와 똑같은 생명의 신비와 창조주의 숨결이 깃들어 있습니다. 존중과 경탄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인간은 간악한지라 두려워하지 않는 이를 좀처럼 존중하려들지 않습니다. 이 두려움 안에는 경외가 있으며, 경탄 또한 있습니다. 내가 쉽게 볼 수 없으며, 내가 함부로 할 수 없으며, 때로는 나보다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 앞에서 압도 될 때에 느끼는 감정리 바로 '아름다움'이며, '누미노제'라고도 부를 수 있겠습니다.


철학의 시작은 경탄이었습니다. 경탄을 잃어버리고 욕망을 탐닉한다면 금수만도 못할 뿐입니다. 힘의 논리를 가지고 주변을 핍박하면서 합리적인체 하는 짐승 한 마리일 뿐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생태적 위기는 온도가 몇 도 올라가는 환경 공학의 문제로 봐선 안됩니다.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우리 내면의 깊은 영적 빈곤이자, 인간 너머의 생명들과 맺고 있던 거룩한 연결망이 무너져 내린 관계의 비극입니다. 영성을 잃어버린 지성이 얼마나 한심한 결말을 맞이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이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를 멈춰 세우기 위해서는 기꺼이 내 삶의 편리함을 덜어내는 작고 남루한 결단들이 필요합니다. 한없이 투박하고 느릿한 일상으로 걸어 들어가,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말없이 착취당해 온 저 침묵하는 피조물들의 신음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우리가 이 짙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 상실한 생태적 감수성을 회복하고, 뭇 생명들과 겸손하게 연대할 때, 비로소 이 상처 입은 별은 우리에게 다시 다정한 품을 내어줄 것입니다.



[다음 글 예고] 이로써 우리는 나의 우울에서 출발해 사회의 구조를 지나, 위태로운 지구의 현실까지 당도하는 길고 긴 12번의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제 이 길고 깊은 사유의 끝에서, 우리는 마지막 에필로그인 13화를 마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일을 살아야 하기에." 부서진 세계 속에서도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다시 '우리'라는 이름으로 희망을 직조해 나갈 수 있을지 그 마지막 위로의 편지를 띄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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