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끊임없이 원할까? -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다
라캉의 욕망 이론으로 본 알고리즘: 우리는 왜 끊임없이 원할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 자크 라캉 (Jacques Lacan)
어린 시절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다가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손에 쥐었을 때의 감각을 기억해 봅니다. 소유했다는 기쁨은 생각보다 일찍 증발해 버리고, 어느 순간 그 대상은 지극히 당연한 일상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은 이내 또 다른 무언가를 향해 움직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의지력 문제나 감사하는 마음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은 이를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의 구조적 특성으로 파악하며, 인간의 언어 구조 자체를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라캉의 사유를 따라가 보면 그 핵심에는 '상실'이 있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습득하고 상징계(Symbolic Order)에 진입하는 순간, 무언가를 영구적으로 잃어버립니다. 언어 이전의 상태, 즉 자신과 세계가 미분화되어 있던 완전한 상태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라캉은 이를 잃어버린 '충만함(Fullness)'이라 부릅니다. 이 충만함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어가 개입하는 순간 인간은 그것을 잃었다고 경험하며, 이 근원적인 상실감이 곧 욕망의 진원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욕망은 이 잃어버린 충만함을 되찾으려는 끊임없는 운동입니다. 그러나 라캉이 짚어낸 핵심 통찰에 따르면, 이 충만함은 애초에 환상에 가깝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대상도 그 빈자리를 온전히 채울 수 없습니다. 욕망의 대상은 언제나 '그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됩니다. 이것을 가지면 행복할 것 같았지만 막상 가져보면 원하던 온전함이 아님을 깨닫게 되고, 욕망은 다시 다음 대상으로 미끄러집니다.
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가 바라는 욕망의 대상은 언제나 '대상 소문자 a(objet petit a)'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가질 수 없는 것의 흔적이자, 도달할 수 없는 충만함의 대리물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 대리물들을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원본을 대체할 수는 없기에, 욕망은 구조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성질을 지닙니다.
이러한 욕망의 구조가 동시대의 미디어 플랫폼과 만나면 어떻게 작동할까요. 현대의 플랫폼들은 이 결핍의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고 공학적으로 활용합니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찾아주는 훌륭한 도우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계속 무언가를 원하도록' 지연시키고 설계되어 있습니다. 사용자가 완전히 만족해버리면 플랫폼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쇼핑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하나의 상품을 구매한 직후 만족감이 사라지기도 전에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화면에 띄웁니다. 콘텐츠 플랫폼은 하나의 영상이 끝나기 무섭게 다음 것을 자동 재생하여 욕망이 잠시나마 충족되어 머무는 순간을 차단합니다. 소셜 미디어의 끝없는 스크롤은 화면 아래에 항상 더 흥미로운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지속시킵니다. 이는 단순히 플랫폼의 악의를 탓할 문제가 아니라,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공허한 순환이 기술을 통해 어떻게 심화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여기에 라캉의 명제를 하나 더 겹쳐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그의 말은, 르네 지라르(René Girard)가 분석한 사회적 차원의 모방 욕망—타인이 원하기에 나도 원하게 되는 현상—과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더 깊은 층위를 가리킵니다. 라캉이 말하는 타자의 욕망은, 타자가 '나를' 욕망해주기를 바라는 근원적인 인정의 갈구입니다. 타자의 시선 속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욕망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원하는 많은 것들의 진짜 내용은 특정 사물 그 자체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을 소유한 나를 타인이 어떻게 바라봐 줄지에 대한 기대가 욕망의 실체일지도 모릅니다.
� 신학의 언어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이 욕망의 문제를 "사랑의 질서(Ordo Amoris)"라는 개념으로 접근했습니다. 인간은 본래 무언가를 사랑하도록 창조된 존재이며, 사랑하는 일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질서는 사랑의 대상과 사랑의 크기가 서로 어긋날 때 발생합니다. 유한한 대상을 무한히 사랑하려 할 때,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을 충족시켜 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길 때 삶의 방향은 어긋납니다.
라캉이 말하는 구조적 결핍과 아우구스티누스의 무질서한 사랑은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매우 비슷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욕망이 유한한 대상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채워지지 않음' 자체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통찰입니다.
두 사유가 갈라지는 지점은 그 다음입니다. 라캉에게 이 결핍은 구조적으로 피할 수 없는 닫힌 조건입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 결핍은 특정한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됩니다.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까지 우리 마음이 쉬지 못합니다"라는 그의 고백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무한한 존재를 향해 지어졌음을 시사합니다. 쉬지 못하는 까닭은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올바른 대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연재에서 두 언어 중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 섣불리 단정 짓지는 않습니다. 다만 두 언어 모두 동일한 지점을 묵직하게 응시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유한한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구조를 인지한다고 해서 일상의 욕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라캉의 이론을 이해했다고 알고리즘의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며,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었다고 해서 새로운 물건을 향한 갈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욕망은 단순한 앎과 인식의 문제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만큼은 조심스럽게 꺼내어 볼 수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알면서도 대면하는 일과, 언젠가 이것이 내 결핍을 완전히 채워줄 것이라 믿으며 무언가를 좇는 일은 삶의 궤적을 다르게 만듭니다. 전자는 욕망과 정직한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이며, 후자는 욕망의 환상에 속아 넘어가는 일입니다. 정직한 대면이 당장 눈에 띄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하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자신에게 조금 덜 속는 삶, 이 부서진 세상에서 유한함을 긍정하며 나아가는 담담한 발걸음은 되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