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호를 산다
"우리는 풍요로움의 기호만을 갖고 있다. 우리는 거대한 생산체계 속에 빈곤과 희소성의 기호를 몰아넣고 마음 졸이며 그것을 주시한다." (출처: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1970)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두 벌 옷을 떠올려 봅시다. 하나는 3만 원, 다른 하나는 30만 원을 호가합니다. 직물의 질감이 약간 다를 수 있지만 두 옷이 수행하는 역할은 동일합니다. 몸을 가리고 체온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기꺼이 30만 원을 지불합니다. 이때 지불자가 얻는 감각은 질 좋은 옷을 확보했다는 만족감 이상의 것입니다. 이전과 다른 무언가를 획득했다고 느낍니다. 그 다름의 실체가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를 '기호(Sign)'라 설명합니다. 그가 현대소비사회를 해부하기로, 현대인은 사물의 사용 가치를 소비하지 않고 사물이 표상하는 기호를 소비한다고 통찰했습니다. 이때, 사용 가치는 사물이 실제로 수행하는 기능에 국한됩니다. 신발은 발을 보호하고 자동차는 이동을 돕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소비는 기능적 차원을 가볍게 초월합니다. 사람들은 특정 브랜드의 신발을 신어 자신의 취향을 전시합니다. 자동차를 소유하여 사회적 위치를 대변합니다. 특정한 식당에서 식사하며 자신이 어떠한 계층에 속하는지 증명합니다. 이때 사물은 단순한 물건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계급, 취향, 삶의 양식을 표상하는 기호로 작동합니다. 우리는 기호를 소비하며 그것이 상징하는 지위를 획득하려 애씁니다. 나아가 그 지위를 타인에게 발신합니다.
보드리야르의 분석은 기호 소비의 구조적 특성을 파헤칩니다. 기호는 차이로 존재를 증명합니다. 30만 원의 지출이 의미를 획득하는 이유는 3만 원과의 가격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특정 상권에 진입하는 이유는 그렇지 못한 이들과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영구적으로 고정하지 않습니다. 어제 선망받던 브랜드가 오늘 대중의 손에 들어오면 기호의 가치는 증발합니다. 어제 각광받던 공간이 오늘 상업화에 물들면 기호는 이동합니다. 기호의 가치는 항상 상대적으로 작동하며 쉴 새 없이 요동칩니다. 그래서 기호를 소비하는 주체는 결코 소비를 중단하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기호를 탐색합니다. 기호를 향한 욕망은 구조적으로 충족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현대의 소비가 끝없는 공허를 낳는 이유가 여기에 존재합니다. 사용 가치는 한계 효용을 지닙니다. 배가 부르면 숟가락을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기호의 욕망은 애초에 충족의 한계선을 설정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더 높고, 더 구별되며, 더 희소한 기호가 등장하여 소비를 압박합니다.
이 기호의 게임은 계급을 나누는 언어로 작용합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를 구별짓기(Distinction)라는 개념으로 살폈습니다. 특정한 취향과 소비 행태는 사회적 계급을 재생산하는 기제로 작동합니다. 어떠한 음악을 향유하고 어떠한 활자를 읽어내며 어떠한 음식을 취하는가.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개인적 선호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전시하는 기호이며, 그 위치를 공고히 다지는 수단으로 기능합니다. 이 분석 앞에서 그저 온전히 나의 의지로 선택했다는 항변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개인이 선호하는 대상 자체가 이미 특정한 사회적 지위와 계급적 훈련이 빚어낸 결과물로 나타납니다. 취향은 자유로운 주체의 선택으로 위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철저하게 계급의 언어를 구사합니다. (출처: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1979)
성서의 전도서는 인류 역사상 끝없는 소유가 주는 공허함을 가장 정직하게 기술한 문헌에 속합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출처: 전도서 1장 2절)
이로써 삶을 소진한 치열한 실험 끝에 내린 뼈아픈 진단을 기록합니다. 지혜자는 지혜를 탐구하고 쾌락을 좇으며, 거대한 과업을 성취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합니다. 그 모든 성취의 끝에서 그는 절망합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출처: 전도서 1장 8절)
더 많이 보고 들으며 소유할수록 내면의 갈증은 맹렬히 타오릅니다. 보드리야르가 진단한 기호 소비의 구조적 결핍을 전도서의 화자는 수천 년 전에 온몸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가 공허함의 끝에서 도달한 자리는 체념에 그치지 않습니다. 기호의 논리가 지배하지 않는 영역을 새롭게 발굴합니다. 타인과 식탁을 나누고 노동에 성실히 임하며 오늘 주어진 일상을 마음껏 느끼는 행위에 주목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기호로 치환하지 못합니다. 타인과의 차이를 생산하지 않으며, 누군가와의 비교로 가치를 산정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곳에서만 인간은 진정한 충족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기호 소비의 굴레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합니다. 기호가 축조한 세계 안에서 생을 시작했고, 그 언어를 매개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이 체계를 전면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는 불가능에 가깝고 지혜롭지도 않습니다. 다만 인식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지금 갈구하는 대상이 사물 그 자체인지 아니면 사물이 둘러쓴 기호인지 질문해봅시다. 나의 지출이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인지, 타인과의 차이를 과시하려는 투쟁인지 의심합니다.
그렇게 획득한 기호 앞에서 내가 실질적으로 느끼는 감각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기호 소비의 구조적 허상을 인지한다고 해서 세속의 욕망이 증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욕망에 끌려다니는 상태와 허상을 응시하며 스스로 통제하는 상태는 극명하게 엇갈립니다. 이렇듯 우리는 구조를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