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브루그만: 생산성을 거부하는 가장 급진적인 행위

혹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시간이 왜 가장 급진적인 행위인가에 대하여

by 광규

"안식일은 제국의 체계에 대한 대안이자 저항이다.

그것은 생산성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안식일은 저항이다』 중에서


모든 스마트 기기를 내려놓고, 책이나 음악조차 없이 그저 5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을 가져본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1분이 채 지나기 전에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이 밀려오겠습니다. 습관적으로 화면을 확인하고 싶어지거나, 처리하지 못한 업무의 목록이 떠오르거나, 손가락이 안절부절 못하겠지요. 심지어 지금 이 귀한 시간을 무의미하게 낭비하고 있다는 조바심에 사로잡히기 쉽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이토록 불편하게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성과와 효율의 논리를 내면 깊숙이 체화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온전히 쉬는 일이 부자연스러워진 세계, 단 1분이라도 무언가를 생산해 내지 않으면 은은한 죄책감을 유발하는 세계.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이 시대의 정신적 풍경입니다.


한국계 독일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피로사회』에서 과거의 피로와 현대의 피로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과거 규율 사회에서의 피로는 공동의 목표를 향한 육체적 노동 이후에 찾아오는 '함께하는 피로'였습니다. 그것은 연대의 감각을 동반하며, 다 같이 쉬고 회복할 수 있는 성격의 피로였습니다.


반면 현대 성과 사회의 피로는 철저히 고립된 피로입니다. 각자가 스스로의 성실한 착취자가 되어 홀로 달리고 홀로 소진됩니다. 이 피로는 타인과 온전히 공유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에게 "요즘 너무 지쳐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일조차,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무능의 신호로 해석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한병철이 이 사회의 처방으로 제시하는 참된 쉼, 즉 '무위(Müsse)'는 목적을 전제한 휴식과 결이 다릅니다. 그것은 다음 날 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어떠한 결과물도 산출하지 않는 시간, 뚜렷한 목적 없이 존재하는 활동 자체를 뜻합니다. 끝없이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해야 하는 성과 사회에서, 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쉼'은 가장 낯설고도 급진적인 행위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가치는 오직 생산성으로만 측정된다'는 시대의 지배적인 전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몸짓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신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안식일(Sabbath)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통해 이 '쉼'이 지닌 정치적이고 실존적인 저항성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창세기의 서사에 따르면 신은 엿새 동안 세상을 빚고 일곱째 날에 안식했습니다. 브루그만은 이를 단순한 종교적 의례의 기원이 아니라, 거대한 세계관을 선언하는 것으로 읽어냅니다. 이러한 관점을 "창조신학"이라고 합니다. '창조'를 과학적으로 풀어내기보다, 창조라는 이야기가 다루는 신학적인 의의를 탐구하며,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을 어떤 가치를 두고서 바라볼 수 있는가'를 논하는 겁니다.


창조주가 쉰다는 것은, 이 세계가 끝없는 생산과 착취가 반복되는 무한 궤도가 아님을 뜻합니다. 완성된 멈춤이 있고, 고요한 쉼이 허락된 질서입니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안식일 계명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쉼의 명령은 특정한 계급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자녀들뿐 아니라 남종과 여종, 심지어 사회의 가장자리에 머무는 나그네와 가축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위계 안에서 스스로 쉴 권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안식의 쉼이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이는 생산성의 높낮이와 무관하게 모든 생명에게 쉴 권리가 존재한다는 평등의 선언입니다.


브루그만은 이것을 이집트 파라오의 제국 체계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으로 해석합니다. 파라오의 세계는 벽돌의 생산을 결코 멈추지 않는 통제 사회입니다. 그곳에 쉼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다른 목소리를 냅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끝없이 찍어내는 생산 기계가 아니며, 존재의 가치는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있지 않으니 이제 멈추어도 좋다는 선언입니다.


안식일의 신학에서 한 가지 더 조용히 짚어볼 지점이 있습니다. 안식은 창조주의 형상을 모방하는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전능한 신이 쉬었다는 것은 쉼이 피조물의 나약함이나 한계에서 비롯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안식을 다루는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근거입니다. 쉼이 결함으로 인함이 아니라 거룩한 것임을 말할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쉼은 창조 질서의 온전한 일부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좀처럼 쉬지 못하는 이유는 남들보다 더 유능하고 강인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자연스러운 질서로부터 너무 멀리 이탈해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 관점을 빌려오면 우리가 흔히 겪는 번아웃(Burnout)은 조금 다르게 해석됩니다. 그것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얻어낸 영광스러운 훈장이 아니라, 안식의 질서를 잃어버린 채 무한 생산의 구조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소진된 상흔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쉬는 법을 다시 배울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거창한 다짐 이전에 조용한 믿음 하나가 필요해 보입니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그 시간 속에서도, 무언가를 눈부시게 성취해 내지 않아도 나는 이미 고유하게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만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실이 쉽게 수긍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우리의 마음이 유별나게 나약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너의 가치는 네가 무엇을 얼마나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이 시대의 가장 서늘한 거짓말이 여전히 우리 내면에서 끈질기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시간이 어째서 저항이 될 수 있는지 묻게 됩니다. 그 저항은 거리를 걷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만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저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떼어두어 어떤 목적도 없는 무위의 쉼을 묵묵히 누리는 것.


그 고요한 멈춤 속에서 찾아오는 은은한 죄책감에 고개를 젓고 동의하지 않는 것. 그 작고 단호한 멈춤이, 끝없이 우리를 소진시키려는 워궤도 속에서 온전한 자신을 지켜내는 소중한 자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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