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누스바움: 우리는 왜 상처받을 줄 알면서 사랑할까

취약함을 인정하는 윤리

by 광규


취약함을 인정하는 윤리 혹은, 부서질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결함이 아닌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취약하기 때문에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타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윤리가 가능하다." —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선의 취약성』 중에서


일상의 대화나 내면의 독백 속에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명제들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강해져야 한다", "쉽게 흔들려서는 안 된다", "감정을 통제하고 타인에게 섣불리 기대지 말아야 한다."


현대 사회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이상적인 인간상은 대체로 철저한 독립성과 자기 충족성, 그리고 빈틈없는 감정의 통제에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문제를 온전히 혼자 감당하려 애쓰고, 공적인 자리에서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는 것을 미숙함으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엄격한 기준 위에서 인간의 취약함은 어떻게든 극복하고 잘 숨겨야 할 결함으로 취급됩니다. 누군가에게 구조를 요청하고 도움을 청하는 일은 나약함의 방증이며, 삶의 무게에 눌려 잠시 부서지는 것은 곧 무능이나 뼈아픈 실패로 규정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완벽한 강인함과 무결함을 추구하는 태도가 우리를 진정으로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는지, 아니면 도리어 서로를 더 깊이 고립시키고 지치게 만들고 있는지는 차분히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들을 깊이 있게 분석하며, 인간의 '취약성(Vulnerability)'이 도리어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조건이라는 사유를 전개합니다.


누스바움이 짚어낸 취약성은 그저 극복해야 할 무력한 약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타인과 세계를 향해 온전히 열려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고유한 성질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상실의 아픔을 겪을 수 있고, 진실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상처받을 가능성 앞에 벌거벗겨집니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헌신하기에, 그것이 훼손되었을 때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낍니다.


누스바움은 이 취약성을 억지로 통제하거나 삶에서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가 도리어 인간을 덜 인간답게 만든다고 봅니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처럼 모든 감정을 완벽히 차단하고 외부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족적인 상태를 이상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깊이 사랑할 수도, 누군가의 아픔에 진심으로 애도할 수도, 타인에게 진실한 관심을 기울일 수도 없게 됩니다. 상처받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일은, 곧 인간성의 가장 빛나는 부분을 함께 도려내는 일과 같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통찰은 우리가 이번 연재를 통해 다루어 온 현대 사회의 여러 징후들과 맞물립니다. 끝없이 무언가를 성취해 내야 하는 '성과 주체'는 스스로에게 조금의 빈틈이나 취약성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지쳐있음에도 지쳤다고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못하고,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조차 멈추어 서서 도움을 청하지 않습니다. 이토록 끈질기게 취약성을 억압하는 태도는, 우리가 스스로를 끝까지 착취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내적 동력으로 작동합니다. 자신의 유한함과 한계를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이 완전히 멈춰 설 때까지 정해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흔히 겪는 번아웃(Burnout)은 종종 이 취약성을 너무 오랫동안 외면하고 억눌러 온 결과입니다. 스스로를 기계처럼 다루던 억압의 무게를 몸과 마음이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해 작동을 멈추는 현상입니다.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번아웃은 부끄러운 나약함의 징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한히 가동되는 기계가 아니라, 부서질 수 있고 명백한 물리적·정신적 한계가 있는 유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가장 정직한 신호입니다.


누스바움은 자신의 철학을 확장한 '역량 접근법(Capabilities Approach)'에서 사회의 수준을 평가하는 중심에 이 취약성을 둡니다. 진정으로 좋은 사회란, 강하고 결함 없는 사람들만이 살아남아 성과를 독식하는 곳이 아닙니다. 구성원들이 각자의 취약성을 안고서도, 나아가 그 취약성과 함께 온전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촘촘한 돌봄의 조건을 제공하는 사회입니다.


기독교 신학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하나의 거대한 역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능한 신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왔다는 '성육신(Incarnation)'의 고백입니다. 이는 절대적인 존재가 배고픔과 피로를 느끼고, 슬픔에 눈물 흘리며, 고통에 노출되고, 끝내 상처받고 죽을 수 있는 가장 취약한 몸의 상태를 입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신학적 사실은 인간의 취약성을 바라보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을 열어줍니다. 취약성은 신이 다그치고 제거하려 했던 불쾌한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신 스스로 기꺼이 선택한 존재의 방식이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이를 두고, 신은 인간의 고통을 안전한 하늘에서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취약하고 부서진 곳으로 직접 뚫고 들어오는 존재라고 해석했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곁에 서기 위해 스스로 상처 입을 가능성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인물 바울 역시 자신의 짙은 한계와 육체적·정신적 약함에 대해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린도후서 12:10)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철저한 역설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투명하게 인정하고 엎드릴 때 비로소 진정한 강함이 시작되며, 그 비워진 빈자리가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고백입니다.


이 신학적 역설은 누스바움의 철학적 사유와 전혀 다른 언어를 입고 있지만 정확히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취약함을 부인하지 않고 묵묵히 인정하는 일이야말로 더 깊은 인간성을 회복하고 타인을 향한 진실한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조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글을 끝으로 세 번째 시즌의 사유를 조용히 갈무리하려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짚어온 시대의 단면들—스스로를 쉼 없이 착취하고 감시하는 구조, 알고리즘에 흩어지는 주의력, 만성적인 우울과 소진, 안식이 허락되지 않는 강박적인 시간, 그리고 취약성의 억압—은 단순히 개인의 의지력이나 노력이 부족해서 발생한 사소한 문제들이 아닙니다.


이 시대가 인간을 어떻게 도구화하고 대우하는가에 관한 거대하고 구조적인 징후들입니다. 한 개인이 결심을 굳게 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빠져나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 견고한 체계 한가운데서도 인간은 멈추어 서서 조용한 틈을 낼 수 있습니다.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견디며 스스로 쉬기를 선택하는 일, 버거울 때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 부서질 수 있는 자신의 취약함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일, 그리고 생산성과 효율의 언어가 아닌 존재 자체의 언어로 자신의 가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일.


이러한 작고 내밀한 선택들이 당장 세상의 거대한 톱니바퀴를 멈춰 세우거나 혁명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들은 무질서하고 부서진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지켜내는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됩니다. 스스로를 온전히 지켜낸 사람만이 타인의 취약함을 알아보고 그 곁을 조용히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취약함을 묵묵히 인정하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서로를 살리는 진짜 윤리가 시작된다는 철학자의 말처럼 말입니다.


이것으로 균열의 시대 3부를 정리합니다.


시즌 4에서는 관계의 위기로 넘어갑니다. 연결되어 있지만 아무도 없는 세계, 타자를 만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우리는 점점 더 깊은 만남을 피하게 되는지에 대하여.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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