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할 수 있는 관계가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드는 이유
"우리는 연결되어 있지만 연결을 두려워한다. 혼자이기를 원하지 않지만 친밀함도 원하지 않는다."
— 셰리 터클(Sherry Turkle), 『외로워지는 사람들(Alone Together)』 중에서
식당에 마주 앉아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하는 두 사람의 모습. 대화가 멈추는 짧은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기기를 꺼내 드는 모임의 풍경. 가족이 한 식탁에 모여 앉았음에도 각자의 시선은 서로 다른 디스플레이를 향해 있는 저녁 시간.
오늘날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서글픈 풍경입니다. 특별히 무례하거나 관계에 무심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어쩌면 우리 자신의 가장 흔한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같은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각기 다른 차원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습니다. 눈 앞에 있는 사람과 다른 풍경을 보고 식사를 한다니, 편리함이 만든 끔찍한 관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관계가 어떤 좌표에 놓여 있는지를 한번 건조하게 비평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기술사회학자 셰리 터클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디지털 기술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끈질기게 추적해 왔습니다. 그녀의 저서 『외로워지는 사람들(원제: Alone Together)』은 이 시대가 마주한 관계의 핵심적인 모순을 제목 자체로 명확히 포착했습니다.
터클의 진단에 따르면, 디지털 연결망은 우리에게 아주 매혹적인 환상을 제공합니다. 인간관계가 주는 이점은 취하면서도, 그 관계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과 책임은 최소화할 수 있다는 환상입니다.
우리는 원할 때 언제든 타인과 접속할 수 있고, 상황이 불편해지면 언제든 접속을 종료할 수 있습니다. 문자와 메시지는 전송하기 전에 여러 번 다듬고 편집할 수 있으며, 응답의 시간조차 내 마음대로 조율할 수 있습니다. 관계의 주도권과 통제권을 온전히 쥐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통제 가능성'이 바로 심각한 고독의 진원지가 됩니다. 진실한 만남은 본질적으로 나의 통제를 벗어난 영역에 존재합니다. 상대방이 나의 예상을 벗어나는 반응을 보일 때, 뜻밖의 갈등이나 의견 충돌을 마주할 때, 혹은 할 말이 사라져 어색한 침묵이 자리를 채울 때. 이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불편한 순간들을 통과하며 관계는 비로소 두터워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점차 이 껄끄러운 마찰을 회피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방식의 연결만을 선택합니다.
그 결과 연결의 절대적인 양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연결의 깊이는 현저히 얕아졌습니다. 소셜 미디어의 친구 목록과 팔로워 숫자는 늘어나고 하루에도 수십 개의 메시지를 주고받지만, 현대인의 외로움 지수가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는 현상은 이를 명확히 증명합니다. 풍요로운 사회적 활동의 이면에 지독한 고립감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셰리 터클은 인간 상호작용을 '접속(Connection)'과 '대화(Conversation)'로 구분합니다. 접속은 통제권을 자신이 쥐는 효율적이고 안전한 소통 방식입니다. 접속 상태에서 인간은 타인에게 노출할 정보와 이미지를 정교하게 선별하고, 원하지 않는 순간에 언제든 교환을 중단합니다.
반면 대화는 진행 속도가 느리고 흐름을 예측할 수 없으며, 자신을 무방비한 취약성 속에 내어놓는 행위입니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은 실시간으로 변하는 상대방의 표정과 눈빛을 직면해야 하고, 침묵 속 불확실성을 감당해야 하며, 때로는 피하고 싶은 진실에도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현대인은 통제하기 어려운 대화를 기피하고 그 빈자리를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수많은 접속으로 채워 넣습니다. 대화를 회피하고 접속을 늘리는 선택이 거대한 연결망 한가운데서 인간을 철저히 고립된 상태로 이끕니다.
신학의 언어로
이처럼 우리가 겪는 거대한 외로움의 근원을 짚어보기 위해, 아주 오래된 텍스트인 구약성서 창세기를 펼쳐보겠습니다.
구약의 창세기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후 처음으로 "좋지 않다"고 선언한 지점을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세기 2:18) 오랜 시간 이 구절은 단순히 결혼이라는 제도의 기원이나 배우자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문장 정도로 좁게 해석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선언은 그보다 훨씬 크고 심오한 인간학적 통찰을 품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애초에 홀로 고립되어 완결될 수 없으며, 반드시 타자와의 얽힘과 관계 속에서만 온전해지도록 지어졌다는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혼자 있는 것'은 피조물에게 허락된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 결핍의 상태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삼위일체(Trinity) 신학은 신 자체를 홀로 고립된 단일자가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완전하고도 역동적인 '관계'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이 서로에게 완전히 자리를 내어주고 사랑으로 연합하는, 완벽하고도 역동적인 '관계' 그 자체를 신의 본질로 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 곧 우리가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인간이 뛰어난 지성이나 권력을 가졌다는 뜻이라기보다, 신의 본질인 '관계성'을 닮았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인간 역시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상호 관계성 안에서 가장 본래의 모습에 다가선다는 의미입니다. 타인을 배제한 채 철저히 홀로 완결되고 통제 가능한 독립적인 존재는, 결코 신학적 관점에서 인간이 도달해야 할 이상향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인간론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디지털 시대의 고립은 단순한 사회학적 부작용이나 심리적 우울을 넘어 신학적&실존적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애초에 지음받은 본연의 존재 목적과 생명의 방식으로부터 정반대로 이탈하고 있는 과정입니다. '함께이지만 혼자인' 이 기이한 상태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문제를 넘어, 인간이 본래 무엇으로 지어졌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가에 대한 묵직한 실존적 물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러한 사유들을 나란히 겹쳐보면, 현대인이 겪는 고립감의 해법이 단순히 네트워크를 더 넓히거나 더 많은 사람과 접속하는 데 있지 않음이 선명해집니다.
타성에 젖은 본능이 추구하는 반대 방향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안전한 '접속'의 화면에서 눈을 떼어, 불편하고 예측 불가능하지만 실체가 있는 타인과의 '대화'로 진입하는 일입니다. 효율적으로 관리되는 관계의 틀을 벗어나, 나의 취약함을 내보일 수 있는 열린 만남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안전하게 편집된 연결에 너무 깊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날것의 깊은 대화를 나누는 일이 어색하고 두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는 것이 버겁고, 타인과의 갈등이 두려워 자꾸만 안전한 화면 뒤로 숨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이 불편함을 피하지 않고 조금씩 견뎌내는 일. 편집할 수 없는 상대의 표정을 마주하고, 통제되지 않는 시간 속에 나의 존재를 고스란히 놓아두는 일. 어쩌면 그 용기 있는 머무름만이, 쏟아지는 무수한 접속들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온전한 관계를 천천히 복원해 가는 유일한 궤적일지 모릅니다.
안녕하십니까. 작가입니다. 균열의 시대 4부로 또 인사 드립니다. 이번 여정을 통해서도 서로 좋은 영감을 많이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