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고립을 넘어 취약한 만남으로
"나-너의 관계 없이는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나-그것의 관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우리는 오늘도 여러 사람을 마주칩니다. 그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일단 상관치 않겠습니다. 저를 예로 들면, 아침에 커피를 건네준 카페 직원, 출근길 지하철에 나란히 앉았던 사람, 서둘러 메시지를 주고받은 업무 파트너들. 수많은 마주침 속에서 상대방을 특정한 기능이나 역할이 아닌, 고유한 인격으로 마주한 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질문해보겠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들은 제게 아무것도 아닐 때가 더 많았습니다. 이런 질문은 동시대 인간관계의 현주소에 조명을 비춥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이 맺는 모든 관계를 두 가지 차원으로 분류했습니다. '나-그것(I-It)'의 관계와 '나-너(I-Thou)'의 관계입니다.
나-그것의 세계에서 타인은 내가 다루고 파악하는 대상에 머뭅니다. 누군가는 커피를 만드는 기능을 수행하고, 누군가는 프로젝트를 완수할 역할을 맡습니다. 이 구조 안에서 타인은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 즉 '그것'으로 전락합니다. 부버 역시 이 관계의 필요성을 인정합니다. 복잡한 사회를 영위하려면 나-그것의 관계를 반드시 요구합니다.
하지만 나-너의 관계가 작동하는 층위에서 타인은 분석하거나 이용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나와 동등한 주체이자, 무한한 깊이를 지닌 온전한 인격이며, 그렇게 서로를 대면합니다. 진정한 만남은 일방향이 아닙니다. 나-너의 관계 속에서 두 존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남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로 변화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나-그것의 관계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구조를 설계했습니다. 네트워킹이라는 이름 아래 관계를 자본과 스펙으로 치환합니다. 타인이 내 목표 달성에 얼마나 유용한지, 내 경력에 어떤 이득을 제공하는지 계산하며 관계의 기준을 세웁니다.
디지털 환경은 이러한 타자의 '그것화'를 가속합니다. 소셜 미디어 프로필은 인격의 총체를 담지 못하고 단편적인 정보의 나열로 전락합니다. 현대인은 수많은 연락처를 축적한 데이터베이스로 취급하며, 타인을 향한 관심을 '팔로우'라는 가벼운 분류 작업으로 대체합니다. 알고리즘은 타인을 취향과 소비 패턴으로 분해하여 제시합니다. 우리는 타인을 전체로 대면하지 않고, 내가 선호하는 특정 정보만을 소비합니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의 고유한 인격은 소거되고, 오직 나에게 제공하는 유용성만 남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립 현상도 근원을 찾아보자면 바로 이런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그것의 관계만 팽배한 세계에서 인간은 구조적인 고독을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기능이나 효용 가치를 걷어내고, 나를 있는 그대로 대우하는 인격적인 만남이 부재할 때 외로움은 깊어질 뿐입니다.
부버는 나-너의 관계를 인위적인 노력으로 쟁취할 수 없다고 규명합니다. 철저히 준비하거나 계획한다고 해서 다다를 수 없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상대방의 눈빛을 응시하는 찰나, 오래된 지인에게서 낯선 이면을 발견하는 순간, 처음 만난 타인과 예상치 못한 진실을 공유하는 순간에 예기치 않게 발생합니다.
이를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차단할 수는 있습니다. 상대를 미리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태도, 대화의 결론을 지레짐작하는 습관, 상대의 이용 가치를 먼저 계산하는 시선은 나-너의 만남을 굳게 가로막습니다.
부버에게 나-너의 관계가 가닿는 궁극적인 지점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부버는 "모든 진정한 삶은 만남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타인과 맺는 진실한 만남이 곧 '영원한 너(Eternal Thou)'인 하나님을 향해 열린 통로로 작용합니다.
여기서 신학적 고백인 동시에 인간학적 통찰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된 만남은 ‘나’라는 좁은 한계를 초월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자아의 한계 안에 갇혀 있던 '나'는 타자를 온전히 마주할 때 ‘나’라는 존재는 바깥을 향하여 열립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는 존재로 거듭납니다.
이마누엘 칸트가 말했던 정언명령 역시 같은 자리를 지목합니다. "타인의 인격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우하고, 결코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 부버의 철학적 언어로 치환하면, 타인을 '그것'이 아닌 '너'로 대우하라는 요청입니다. 타인을 수단화하지 않는 태도를 윤리의 가장 단단한 밑바탕으로 삼습니다.
일상에서 나-너의 관계를 회복할 길을 모색합니다. 부버의 제안은 명료합니다. 현재의 시간에 온전히 머무는 실천을 요구합니다. 손에 쥔 기기를 내려놓고, 다음에 반박할 말을 미리 계산하지 않으며, 상대를 향한 판단을 잠시 유보합니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진심으로 청취하는 태도를 유지합니다.
현대인은 나-그것의 관계가 제공하는 안전함을 선호합니다. 나-너의 관계를 구성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고 변화하며, 상처받을 수 있는 무방비한 취약성을 짊어집니다. 자기가 취약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우리는 타인을 안전한 '그것'의 자리에 묶어둡니다. 상처를 피할 수는 있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깊은 외로움을 떠안습니다.
오늘 단 한 사람이라도 그가 수행하는 역할 너머의 고유한 존재 자체로 대면하기를 제안합니다. 상대를 분석하는 시선을 거두고, 통제할 수 없는 대화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삭막한 나-그것의 세계에 나-너의 만남을 복원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