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레비나스: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타자의 얼굴과 무한의 책임: 우리는 왜 다름을 허용해야 하는가

by 광규


"Le premier mot du visage est le « Tu ne commettras pas de meurtre »."

"타자의 얼굴이 던지는 첫마디는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전체성과 무한』 중에서


자신과 전혀 다른 궤적을 주장하는 사람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경험을 떠올려 볼까요? 정치적 견해, 종교, 세대, 삶의 방식이 판이한 사람의 목소리를 끝까지 청취하는 일은 점차 일상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그것이 무척 싫고 괴롭기 때문이겠지요.


오늘날 한국 사회는 수많은 쟁점으로 인하여서 양분되어 있습니다. 부의 양극화 이념의 양극화가 갈수록 치열해집니다. 많은 사람이 견해가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보다, 아예 관계를 단절하거나 속마음을 감춘 채 피상적인 대화만 나누는 쪽을 택합니다. 그리하여 나와 다른 가치관과 정체성은 점차로 내 주변에서 사라지는 겁니다. 끔찍한 자기확신과 확증편향에 가득찬 편향적인 목소리가 많이 들리는 이유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the Other)라는 주제를 철학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그는 서양 철학이 타자를 인식 대상으로 삼고 자아 체계로 편입해 왔다고 비판합니다. 타자를 이해하고 분류하여 자아의 연장선으로 취급하는 행위는 진정한 대면을 가로막습니다. 레비나스가 규명한 타자는 자아 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독립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타자의 '얼굴(Face)'은 자아에게 무한한 책임을 요청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근본적인 윤리적 명령은 타자 얼굴에서 발원합니다.


이 철학을 일상에 적용하면, 타자를 진정으로 만난다는 의미는 그를 내 기대와 판단 틀에 가두지 않는 행위를 뜻합니다. 타자가 내 예상을 벗어나고 내가 그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할 때, 그 다름을 다름 자체로 허용하는 태도를 요구합니다.


현대인은 타자를 대면하지 못하도록 시스템이 설계한 구조 속에서 살아갑니다. 미국의 시민운동가 엘리 프레이저(Eli Pariser)는 저서 『생각 조종자들(The Filter Bubble)』에서 알고리즘이 정보를 개인화하는 현상을 '필터 버블'로 정의합니다. 그는 검색 엔진의 결과 도출 방식을 규명 사례로 삼습니다. 두 사용자가 동일하게 'BP(영국석유회사)'를 검색할 때, 알고리즘은 각자의 과거 데이터를 분석해 판이한 결과를 노출합니다. 한 사용자에게는 주가 동향과 투자 정보를, 다른 사용자에게는 멕시코만 석유 유출 사고와 환경 오염 뉴스를 제공합니다.


사용자의 클릭과 체류 시간을 학습한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동의할 만한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제공합니다. 프레이저는 이 기술적 편의가 사유의 고립을 초래한다고 경고합니다. 사용자는 방대한 정보를 주체적으로 탐색한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이 형성한 좁은 거품(Bubble) 안에 갇힙니다. 그의 세계는 점차 사용자와 유사한 성향을 지닌 정보가 채웁니다.


알고리즘은 거품 내부에서 이질적인 관점이나 불편한 정보를 구조적으로 차단합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유사한 성향을 지닌 정보만 소비하며 확증 편향을 강화합니다. 그 결과 구성원이 합의할 객관적 현실은 붕괴합니다. 타자가 지닌 삶의 방식과 낯선 사유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세계는 타자를 철저히 지워냅니다.


타자를 만나지 않는 환경에서 자아의 생각은 절대적 진리의 위치를 차지합니다.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며, 자신과 다른 존재가 등장할 때 그 차이를 견디지 못합니다. 차이는 위협으로, 당혹감은 분노로 번집니다. 현대 사회가 직면한 극단적 혐오와 사회적 분열의 원인을 이 구조적 현상에서 부분적으로 규명합니다.


신학의 언어로

신약성서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깊은 적대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오래전 유대인의 조상 다윗의 시대에 세워졌던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사후 남북으로 분열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북쪽에 자리한 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 제국의 침략에 멸망당하고, 침략자들은 정복지 백성들을 강제로 타국으로 이주를 보내는 민족융화 내지는 말살정책을 펼칩니다. 제국에 반역할 원동력을 뺏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이 아주 잘 들어맞아 수백년이 지나도록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겼습니다.


앗시리아 제국의 식민정책에 의해 혈통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이들을 ‘사마리아인’이라 부르며 유대인들이 멸시한겁니다. 우리의 조상들도 청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발생한 ‘호로자식’ 그리고 ‘화냥녀’라는 비슷한 멸칭이 있습니다. 역사적 비극이 빚은 멸칭, 타자의 개인된 인격성을 철저히 무시하는 카테고리 분류법입니다. 그것이 수세기를 지나 예수의 시대까지 남아있었으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곪은 상처가 얼마나 깊었을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 서사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주체는 바로 그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는 이웃의 범주를 동일한 민족이나 종교 집단으로 제한하지 않고, 가장 낯선 타자로 확장합니다. 신과 이웃을 사랑하라를 유대교 율법의 핵심이자 중심으로 제시한 예수에게, ‘내 자신처럼 사랑할 이웃’의 범위는 단순히 ‘옆집 사는 유대인 아무개’가 아니었던 겁니다.


레비나스의 철학과 교차하면, 이 비유는 도움이 필요한 타자 얼굴 앞에서 자아는 타자의 정체성을 선제적으로 묻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타자 얼굴이 먼저 요청하고, 자아가 그 요청에 응답하는 지점에서 윤리가 발생합니다.


필터 버블 구조는 이 이웃의 범주를 물리적으로 축소합니다. 사용자와 유사한 존재만이 세계에 진입하며, 낯선 타자의 얼굴을 대면할 기회를 박탈합니다. 타자 얼굴이 사라진 자리에서 윤리적 감수성 역시 좁아집니다.


타자를 견디는 경험은 자아를 안락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타자는 자아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타자와 내가 가까워질수록 타자는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경계를 흔들고 확장합니다. 이 불편함이야 말로 인격 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필터 버블 구조에서 의도적으로 이탈하라고 제안합니다. 자발적인 불편함을 선택하기를 권면합니다. 나와 정치적 지향이나 세대가 다른 타인과 대면했을 때, 서둘러 논쟁을 매듭짓거나 내 주장을 관철하려는 조바심을 잠시 내려놓습니다. 대신 판단을 유보한 채, 상대방이 그런 입장에 서게 된 맥락과 사유의 과정을 그저 묵묵히 청취해 보는 겁니다.


이런 낯선 대면을 유지하는 능력이 인간의 보편적 존엄함을 전제하는 민주주의와 또한 공동체를 지탱하는 기반으로 작동합니다. 타자를 견디지 못하는 구성원들로 구성한 사회는 공동의 삶을 유지하는 동력을 상실합니다. 타자를 견뎌내는 능력은 곧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낯설고 불편한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묵묵히 응시하는 그 자리에, 우리가 잃어버린 윤리와 다정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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