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설교자의 철학 이야기
내가 써서 남기고 싶은 글도 있지만 꼭 전해졌으면 하는 좋은 언어가 담긴 글을 쓰고 싶어 졌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부터는 공들인 글도 남겨야 할 것 같다. 한편 쓰는데 길게는 반년에서 짧게는 한 달이 걸리는 설교처럼 쓰면서도 내가 바뀌고 성장하던 그런 글들을 나누고 싶어 졌다. 내어줌에 있어 조금 더 사랑이 담겨서 그런가 보다.
[억지 교훈]
억지로 교훈과 훈교를 하려는 글이 아닌 사랑해서, 사랑이 피어나서 적는 문장을 지면에 남겨야 한다. 설교를 쓰기 전 하는 다짐이 있다. 그러나 언제나 잊어버리는 중요한 나만의 규칙이 있다. 내가 아파서 적는 글이 아니라면, 그러므로 누군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전하는 글이 아니라면, 차라리 쓰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저 나의 속이 후련해지기 위해 내는 분노는 실체도 없을 뿐 더러 그 누구를 위해서도 내는 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이기적인 동기로 시작한 파괴적인 표출은 결국 모두를 다치게할 수 있으며, 화자가 되는 나 자신에게도 너무나도 해로운 말뿐이다.
아픈 마음으로 글을 적었을 때 내 마음엔 사랑이 있었다. 사랑이 없더라면 무던히 넘어갔을 일들이 가슴에 박혔다. 하지만 나의 생각을 가르치려 주장하지 않았다. 아픈 글은 너무나 쓰기 쉬웠다. 내 마음은 병들어있었고, 나는 언제나 아팠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책 없는 호소는 그 누구에게도 선한 영향을 주지 못할 터였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나 자신에게도 아무런 발전도 위로도 가져다주지 못할 공허한 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철학하다]
사랑을 철학했다. 나의 관철엔 언제나 아가페가 있길 소망했다. 그것은 나를 추켜세우는 글을 쓰지 않도록 나를 붙잡았다. 그러지 않더라도 돌아보면 내 겉은 초라했고 내 속은 비루했다. 그럴 때일수록 나를 부풀릴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속이 텅 빈 수레가 그렇듯 언젠가 탄로 나 이전에 했던 좋은 것들 조차 의심과 조롱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하기 편한 말은 좋은 말이라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좋아할 말은 어떨까? 흔히들 말한다. 그렇게 해야 인기를 얻지 않겠냐고. 그렇게 해야지 사람들을 끌어모으지 않겠냐고. 그래야 사람들이 너를 찾고 너의 말에 무게가 실리지 않겠냐고.
하지만 감언이설엔 사랑이 없었다. 듣는 이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너무나 애정 해서 듣는 귀를 이용하기 위해 할 뿐인 말은 더 이상 손 끝에서 써 내릴 가치가 없었다. 그런 글은 해로웠다. 나는 예술을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고귀한 철학을 세우려 함도 아니다. 하지만 이 역시 언제나 설교 전 기도하듯 저들이 듣고 싶은 말과 내가 전하기 편한 말엔 생명이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런 말들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도 아니었다.
[어렵게 쓰여진 글]
아픔에서 글이 나온다. 그러나 그 전엔 언제나 사랑이 있어야 했다. 겸손하게 적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나보다 타자를 더욱 인정하고 아껴야 했다. 이 역시 사랑이었다. 예쁜 말로 전하려 해야 했다. 상처를 주려는 게 아니라면 아픔을 만지더라도 어루만지며 가슴에 품는 그런 말로 함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쉽게 말해 좋은 글. 조금 펼치자면 전해 들어야 하며 꼭 내가 전해야 하는 그런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며 쓰고 싶다는 의미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하기 편한 말 그리고 저들이 듣기 편한 말과 듣고 싶은 말만을 전하는 건 서로를 살게 하는 그런 사랑이 결여되어있으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내가 편하기 위해, 내가 잘되기 위해 하는 그런 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신학 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렇게 사역을 해선 안됐다. 결국 내가 해야만 하는 그리고 꼭 전달되어야만 하는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랑을 해야 했다.
쉬워 보이는 결론을 내기 위해선 내가 더욱 고민하고 아파해야 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그런 글을 이제는 남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