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회사 마케터 이야기
지난 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이슈 중 하나가 바로 '90년생'이다. 제조업에 장기근속자가 많은 우리 회사는 평균 연령이 높은편에 속한다. (삼십대 중반인 내가 팀장급에선 가장 막내, 전체 직원 중에는 뒤에서 30% 정도 수준) 그런 우리 회사에도 작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마케팅, 개발직 부서를 중심으로 90년대생이 입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80년대 생이다. 그것도 80년대의 가장 한 가운데, 지금은 한국 나이로 30대 중반. 88올림픽 여자 100m 결승전을 현장에서 보았고, 고3이던 그 시절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에 진출하는 바람에 나는 수능을 망쳤다(라는 핑계를 대기가 참 좋았다).
'90년생',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많은 책이나 이야기에서 나와 같은 '끼인세대'를 설명하는 부분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자유분방한 90년대생을 갈망하면서 여전히 몸과 생각 속에는 옛 방식이 익숙한 세대가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공감한다. 더 나은 방향을 늘 고민하지만, 여전히 옛 방식이 체화되어 있는 끼인세대... 그래서 주저하고 단념했던 일들도 참 많았다.
하지만 90년생은 우리와 또 다른 것 같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지만) 대체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데 어려움이 덜하고, 좋아하는 것에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것이 회사에서 경험하는 이들 세대의 특징인 것 같다.
전시회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나를 포함한) 80년대생 팀장 두 명과 90년대생 직원 두 명이 모여 우리 부스를 방문하는 전시 관람객들에게 드릴 선물에 대한 아이디어 회의를 가졌다.
"우리도 브랜드 굿즈 한 번 만들어 볼래요?"
'붙인다'라는 속성의 라벨을 우리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마스킹테이프로 풀어보고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는데, '다꾸'에 관심이 많은 90년대생 직원들이 이에 호응을 했다. 보통은 내부 실무자들에게 소개하고 설득하는데만 한참인데, 90년대생들의 관심사를 90년대생에게 이야기 했더니 금방 일이 진행되었다.
임원진에게 최종 보고를 하는 날, 평소에는 팀장 선에서만 참석하는 회의에 90년대생 직원들을 함께 참석시켰다. 물론 첫 반응은 역시 예상한대로였다.
'이게 뭐냐? 이런 걸 누가 쓰냐?' (많이 순화했어요...)
임원들의 이런 반응에서 평소의 나라면 두 가지 중에 하나로 상황을 종결했을 것이다. '그렇죠..?'라며 없던 일로 하던지, 애써 설득해보지만 결국 설득이 안되던지.... 그런데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90년대생 직원들이 90년대생 자녀를 둔 60년대생 임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80년대생인 우리가 '지금 20대가 이런걸 좋아해요'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안되던 일이 쉽게 풀렸다. 그들이 좋아하는 게 곧 지금의 트렌드였기에 ㅋㅋㅋ 그렇게 우리는 마스킹테이프로 브랜드 굿즈를 만들었고, 전시회에서 마스킹테이프는 없어서 못 나눠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최근에는 우리팀 90년대생 마케터에게 세컨 브랜드의 PM을 맡겼다. 팀장인 내가 모든 브랜드를 관리하기에는 너무 무리가 있어서 이기도 했지만, 작은 회사에서.. 특히 마케팅 파트에서 자신이 담당하는 분야가 없이 주니어급에서는 수동적으로 일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에 두 명의 부사수와는 이 부분에서 제대로 역할 분담을 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 브랜드에 마케팅 담당자와 제품을 만들어내는 상품개발자 두 명을 PM으로 붙여두고, 팀장들은 뒤로 빠졌다. (물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거나 최종 책임을 지거나 하는 건 그대로이다.) 그랬더니 이 둘이 시너지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취향이 곧 주 타겟층의 취향인 부분이 많았기에 시장조사부터 상품기획, 홍보, 채널 운영까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브랜드의 담당으로 역할을 부여했더니 애정과 책임감을 갖고 브랜드의 방향성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자기 브랜드’라는 마음가짐으로 능동적으로 일을 한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회사의 분위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은 회사는 90년대생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에 적합하다. 워낙 체계가 복잡한 대기업이야 의사결정 구조에 참여하는 이들이 많아 쉽진 않겠지만, 작은 회사의 경우 부서의 부서장 혹은 임원진들의 결단만 있다면 충분히 의사결정 과정에도 참여시킬 수 있다.
결정은 우리(혹은 회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