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회사에서 '정치'가 아닌 '관계'를 쌓아가기
어릴 적 도움을 참 많이 주신 형님이 한 분 계셨다. 평소 남들에게 상냥한 편이라던가 큰 명분이 없는 한 누군가를 도와주시는 분이 아닌데, 어찌 그의 마음에 들었는지 유독 나에겐 키다리 아저씨처럼 말없이 도움을 주셨다. 나는 그런 형님께 언제나 도움만 받는 것 같아 늘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님과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데 그동안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는 이야기를 내게 해주셨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어떻게 그 은혜를 갚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보다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드려 봐. 도움을 주는 입장에서는 그 한마디에서 보람을 느끼고 앞으로도 이 친구는 계속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되거든.”
그 이후로 나는 어떤 작은 도움을 받더라도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고자 애썼다. 의식이 습관이 될 때까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때론 돈일 수도 있고, 좋은 환경일 수도 있고, 아님 내가 가진 무언가 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된 마음’인 것 같다.
작은 회사에서 마케터는 일을 잘하는 것만큼 '관계를 잘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마케터는 혼자 고립되어 일할 수 없는 직종이다. 늘 누군가와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고, 다양한 유관부서에 협조를 구해야 할 일도 많다. 그런데 작은 회사일수록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가 더욱 촘촘하고, 마케터 스스로 일당백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더욱 '관계'는 중요하다.
나도 처음 1-2년은 이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참 애를 많이 먹었다. 당시 회사에서는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마케팅팀이라는 부서가 신설이 된 상황이었고, (회사 기준에서) 너무 어린 나이의 팀장이 들어와서 과연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의 시선도 있었다. 처음부터 의욕적으로 하고 싶었던 것이 많았지만 타고난 쫄보인 덕분에 빼장 좋게 나댈 수도 없었다. 분위기를 살피면서 모든 직원들에게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다가갔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을 보냈다.
정보를 잘 공유해주지 않아 답답할 때도 많았고, 이건 원래 마케팅팀이 해야 하는 일이라며 이런저런 업무를 떠안게 되어 업무의 과부하가 생길 때도 있었다. 도망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일단 버텼다. 의심이 신뢰가 될 수 있도록 ‘관계’를 쌓아가면서.. 그러자 동료 분들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끔씩 본사에서 서울 사무실에 방문할 때마다 꼭 따로 불러내어 평소 접할 수 없는 현장의 이야기를 들여주시는 영업팀장님. 마케팅에 필요한 통계 프로그램이 필요하냐고 물어봐주시는 프로그램 개발팀의 매니저님.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기한에 맞춰 정성스레 샘플 출고를 진행해주시는 출고실 담당 직원 분까지...
지금은 '관계'로 쌓인 동료들 모두가 나의 영감이자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시도해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원동력이다.
회사에서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을 '사내정치'나 '파벌'을 만드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관계를 잘하는 것'과 '정치를 잘하는 것'은 다르다. 관계를 잘하면 뜻을 함께할 수 있는 동료가 생기고, 합심하여 회사나 브랜드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일을 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정치를 잘하는 사람 주변에는 동료보다 적이 많고, 회사나 브랜드가 나아가야 할 방향보다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일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아주 오래 살아남을 순 있을 것 같다.)
'관계'를 쌓아가기 위해서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써서 친분을 만들거나 잦은 회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모든 관계는 우리에게 주어진 법정근로시간 내에서 쉬는 시간 동료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리고 짧은 미팅과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충분히 쌓을 수 있다.
‘관계’ 안에서 쌓인 신뢰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하는 태도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 신뢰를 통해 해보고자 하는 일들을 조금 더 수월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꼭 회사 내에서 만의 '관계'가 전부는 아니다. 내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친구들, 자주 들리는 식당이나 카페의 사장님들, 업무상으로 만나게 되는 여러 담당자분들.. 이들 모두가 다 소중한 '관계'이다.
많은 자원을 가용할 수 없는 작은 회사의 마케터로서 회사 밖의 ‘관계’는 너무도 훌륭한 자원이다. 커피 한 잔에 흔쾌히 촬영 장소를 내어주시는 카페 사장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무언가 배워오기도 하고, 촬영을 부탁했는데 장비까지 손수 챙겨다 주는 친구네 부부. 고립된 인하우스 마케터에게 다양한 정보와 도움을 주시는 옛 동료들까지..
늘 드릴게 많지 않아 죄송스러울 뿐 명분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서 주시는 회사 밖 '관계'들로 인해 오늘도 작은 회사의 마케터는 조금 더 풍성한 무언가를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