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호의 문을 열었다.
열두 명이 ㄷ자로 둘러앉아 있었다. 세혁이 들어서자 시선이 일제히 왔다. 기대, 호기심, 생경함. 낯선 동양인을 맞이하는 눈들이었다.
강의실에는 열두 개의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아홉 개는 클럽 것이었다. 나머지 세 개는 달랐다.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비자나무판, 가로로 결이 고운 조개 바둑알. 직접 가져온 것들이었다. 한국에서도 보기 드문 것들. 이 사람들이 바둑을 어떻게 대하는지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마르쿠스는 첫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세혁을 봤다. 따뜻함도 적대감도 없는 눈이었다. 세혁은 방 한가운데 섰다.
"I will give you all nine stones."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강의실이 술렁였다. "내가 얼마 전에 미국 프로기사랑 7점에 1대 1로 뒀는데, 뭐라고?" 마르쿠스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세혁을 봤다.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롭겠다는 눈이었다.
각 바둑판 위에 흑돌 아홉 개가 내려앉았다.
열두 개의 판. 화점마다 박힌 검은 돌들. 세혁은 그 사이를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열두 개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혁이 마르쿠스 앞에 섰다. 돌통 안에 손을 넣었다. 백돌 하나를 쥐었다. 차가웠다.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놓았다.
탁.
그 소리와 함께 뭔가가 빠져나갔다. 시차의 무게도, 마르쿠스의 눈도, 수연의 걱정도. 그 떨림도. 남은 건 열두 개의 판과 지금 이 순간뿐이었다.
세혁은 걸어갔다.
탁. 탁. 탁.
세혁은 판에서 판으로 원을 그렸다. 멈출 수 없었다. 다면기는 그런 것이었다. 흐름이 끊기는 순간 모든 게 무너졌다. 몸이 먼저 알고 있어야 했다. 생각이 아니라. 상대들의 수는 읽혔다. 온실 속 화초 같은 바둑이었다. 책에서 베낀 모양들. 실전의 바람을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수들. 다음 수가 보이는 순간 이미 돌이 놓여 있었다.
탁. 탁. 탁.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클럽 멤버들이 세혁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기 시작했다. 리듬이었다. 일정하고 규칙적인. 탁. 탁. 탁. 마치 시계처럼. 마치 심장처럼. 마르쿠스의 판도 처음엔 읽혔다. 아마추어의 바둑이었다.
탁.
중반 이후였다. 마르쿠스가 돌을 놓자 세혁은 그 판 앞에서 멈췄다. 이유가 없어 보이는 자리였다. 지금 당장은 아무 힘도 없는 돌이었다. 세혁은 한 박자 더 봤다. 그리고 직감했다. 저 사람은 돌을 숨기고 있다. 열두 판의 혼란 속에 의도를 묻어두고 있었다. 세혁은 고개를 들었다. 마르쿠스는 판을 보고 있지 않았다. 세혁을 보고 있었다. 그 눈에서 뭔가가 읽혔다. 계산이었다. 바둑판 위의 계산이 아니라 세혁을 향한 계산이었다.
세혁은 다음 판으로 걸어갔다. 탁. 돌아왔다. 거기도 있었다. 작고 조용한 돌 하나. 탁. 돌아왔다. 또.
불안이 올라왔다. 열두 판이 머릿속에서 동시에 살아있었다. 거기에 마르쿠스가 혼란을 심고 있었다. 실 하나를 잡아당기면 열두 개의 매듭이 풀렸다. 어금니를 깨물었다. 무릎이 미세하게 떨렸다. 판과 판 사이를 걷는 발이 무거웠다. 열두 개를 동시에 붙들고 있는 것은 생각이 아니었다. 버티는 것이었다.
세혁은 그 돌을 봤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더 선명해졌다. 불안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커졌다. 그런데 그 불안이 눈을 맑게 했다. 판이 보였다. 마르쿠스가 묻어둔 것들이 보였다. 극한에 몰릴수록 오히려 맑아지는 것.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알고 있었다. 저 사람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것을.
탁.
세혁은 걸어갔다.
시간이 흐르고 판들이 끝나기 시작했다. 수가 약한 쪽부터였다. 흑돌들이 포위됐다. 살 길이 없었다.
"I resign."
구경꾼들 사이에서 낮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탁. 탁. 탁.
세혁은 멈추지 않았다.
강의실의 소리가 멀어졌다. 숨소리도, 의자 끌리는 소리도, 마르쿠스가 판을 짚는 소리도. 다 멀어졌다.
오직 그것만 있었다. 이 판. 이 돌. 이 수.
마르쿠스 판 앞이었다. 백돌 하나를 집었다. 위험해 보이는 자리였다. 스스로 포위망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자리였다. 놓았다.
탁.
강의실이 웅성거렸다.
세혁은 걸어갔다. 탁. 탁. 돌아왔다.
마르쿠스가 주저 없이 그 돌을 잡았다.
세혁은 걸어갔다. 탁. 탁. 돌아왔다.
판이 달라져 있었다. 세혁은 멈추지 않았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돌이었다.
몇 수가 더 지났다. 강의실이 얼어붙었다. 웅성거림이 멈췄다.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마르쿠스가 멈췄다. 두 사람의 돌이 서로를 조이고 있었다. 한 수. 단 한 수 차이였다. 강의실 안의 모든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세혁이 마지막 돌을 집었다.
백돌 하나.
강의실이 완전히 멈췄다.
탁.
마르쿠스는 판을 오래 봤다. 아주 오래.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계산하던 눈이 없었다. 분석하던 눈이 없었다. 뭔가를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에, 설명할 수 없는 걸 처음 본 사람의 빛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속임수가 아니었다.
"I resign."
12대 0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식은땀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손끝이 다시 떨렸다. 처음과 같은 떨림이었다. 그런데 달랐다. 처음의 떨림은 두려움이었다. 지금의 떨림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어딘가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세혁은 그 소리를 멀리서 듣듯이 들었다.
'됐다.'
세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