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로 나오자 목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혁의 표정을 살피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이 교차했다.
“일단 뭐라도 드세요. 카페테리아로 가죠.”
오전 10시의 카페테리아는 한산했다. 점심시간 전이라 학생 몇 명만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노트북을 두드리거나, 책을 읽거나, 멍하니 창밖을 보는 풍경. 고요했다.
세혁은 주문한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목석이 맥북을 열며 말을 건넸다.
“전 논문 마감이 좀 급해서요. 잠깐만 같이 있다가 먼저 일어 설게요. 필요한 거 있으면 문자 주세요.”
세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석은 곧장 화면 속으로 눈을 돌렸다. 세혁을 의식하지 않는 그 태도가 오히려 편안했다. 어설픈 위로보다 담백한 방치가 나았다.
커피는 서서히 식어갔다. 컵을 감싼 손바닥에 미지근한 온기가 남았다. 창밖으로 학생들이 오가는 캠퍼스가 보였고 낮은 웅성거림이 들려왔지만, 세혁의 귀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자꾸만 마르쿠스의 눈빛이 떠올랐다. 온기도, 적대감도 없던 눈. 철저히 계산기를 두드리던 눈. 수연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그 서늘한 시선. 평범한 퍼포먼스로는 결코 저 눈을 흔들 수 없다는 걸 세혁은 알 수 있었다.
'돌아갈까.'
패배의 습관이 스멀 올라왔다. 수연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하지만 그 길 끝에 기다리는 건 서랍 속에 처박힌 강의 계획서뿐이었다. 석사 수료 후 7년째 제자리걸음인 삶.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정체된 현실이 지금 마주한 벽보다 더 무서웠다.
세혁은 눈을 감았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고요를 뚫고 들어왔다.
탁. 탁. 탁.
익숙한 리듬이었다. 그 소리가 세혁의 머릿속에서 초읽기 소리로 바뀌었다.
하나, 둘, 셋.
제한 시간이 다 되면 계시원이 숫자를 뱉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넷... 숫자가 높아질수록 잡생각은 마모되고 두려움은 휘발된다. 오직 '수'만 남는다. 평생을 그 소리에 쫓기며 살아왔다. 수만 번의 초읽기를 견디며 깨달은 것이 있다. 초읽기가 시작되면 싸워야 할 대상은 상대가 아니라, 그 숫자 안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 둘, 셋.
순간, 카페테리아의 소음도, 낯선 영어도, 마르쿠스의 눈빛도 멀어졌다. 세혁은 사라졌고 수만 남았다.
고아원의 기억은 대개 차가웠다. 빳빳한 이불, 통제된 시간, 이름 대신 불리던 번호. 고달픈 것들 투성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다. 마당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던 시간, 그리고 바둑. 여섯 살 무렵, 고아원 옆 기원에서 바둑판 몇 개를 기부했다. 바둑판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은 서툴렀지만 세혁과 두고 싶어 했다. 지고 나서도 다시 판 앞에 앉았다. 세혁은 그들이 지치지 않게 돌을 여러 개 깔아주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두세 판을 동시에 두는 법을 익혔다. 판마다 상대가 다르고, 수준이 다르고, 호흡이 달랐다. 세혁은 그 판들 사이를 유영하며 응수했다.
세혁은 눈을 떴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완벽한 수를 발견했을 때의 전율과는 다른, 생경한 불안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생의 어떤 순간에는 선택권이 아예 주어지지 않기도 하는 법이니까.
'저 안의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바둑을 알지만, 세혁만큼 깊이 들어와 보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 핸디캡을 주고 동시에 상대하면 된다. 구구절절한 말은 필요 없다. 바둑판이 대신 말하게 하면 된다.
약속 시간까지는 한 시간 남짓.
세혁은 핸드폰을 꺼내 목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강의실 가운데를 비우고 'ㄷ'자로 좌석 배치해 줄 수 있어? 바둑판은 몇 개나 있지?]
답장은 즉각적이었다.
[열댓 개 정도요. 근데 갑자기 왜요?]
세혁은 식어버린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다면기로 할 거야.]
1분, 2분. 침묵이 이어졌다.
마침내 답이 왔다.
[... 알겠어요.]
세혁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창밖으로 두 개의 굴뚝이 보였다. 높고 검은 기둥이 여전히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