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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유-01] 나의 집짓기

한 개인의 인생에서 자기 집을 짓게 되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by 딸삼빠

한 개인의 인생에서 자기 집을 짓게 되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 드문 일, 내 나이 50에 ‘우리 집’을 지어 살게 되었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글을 쓰나 싶다가, 우연한 계기가 생겨 주절주절 써 본다.

상도동 살던 때였을까? 외발산동이었을까?

난 결혼 전까지 단독주택에 살았다. 사진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상도동 산동네집, 어렴풋한 외발산동을 거쳐, 신월동의 작은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았고, 국민학교 1학년 10월에 대지 36평의 사당동 단독주택(실제로는 주인집을 제외하고는 방마다 세를 주었던 다세대 주택)인 낡은 2층집에서, 32살 결혼할 때까지 살았다. 단독주택이라지만, 시멘트 발라진 좁은 마당에, 나무 한 그루 없었다. 그 이후로는 아파트에서 쭈욱 살아왔다.


많은 남자들이 그렇듯, 결혼 후 두 번 정도 전원생활을 꿈꿨다. 한 번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연에서 놀게 해 주고 싶어서, 한 번은 인생 후반기에 삶으로. 2004,5년부터 건강한 집짓기, 친환경주택, 패시브하우스, 제로에너지주택, 스스로 집 짓기에 관심을 가졌다. 스트로베일하우스 워크숍에도 참여했다. 계속 그렇게 단독주택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살았다. 하지만, 돈도 땅도 마땅치 않았다.

리모델링한 더불어 숲

2011년 42살, 작은 집을 짓고 싶어서, 직장인 경희대 국제캠퍼스 인근에 땅을 찾고 있었다. 저렴히 나온 필지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도로가 닿지 않은 맹지였고, 실망하는 내게 중개업자는 생뚱맞게도 원룸건물을 소개했다. 불이 나는 바람에 거의 땅값만 받고 파는 거라고 했다.


이렇게 불이 난 3층 주인집을 리모델링하고, 7년 반 동안 팔자에 없던 원룸을 운영하며 살게 되었다. 1,2층 각 10개, 3층 투룸 1개, 총 21개 호실 원룸을 운영하면서 했던, 온갖 몸과 마음의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얘기하겠다.

옥상에서 물놀이

‘더불어 숲’이라고 집 이름도 짓고, 아이들은 옥상에서 물놀이를 했다.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길에서 공도 차고, 배드민턴도 치고, 인라인 스케이트도 탔다. 집옆 축대 위에는 돌나물과 꽃잔디를 심었고, 텃밭에는 소소한 먹을거리와 복숭아나무, 무화과, 매실나무, 대추나무, 아로니아, 오미자나무, 돼지감자, 고구마, 감자, 서리태, 들깨 등 각종 나무들과 채소, 꽃을 심었다. 벌레가 다 파먹은 복숭아로 잼을 만들기도 하고, 아이들 얼굴처럼 매끈하고 작은 무를 수확하기도 하고, 감자를 키워 쪄먹고, 콩타작을 했다.

축대위 돌나물과 아랫쪽 화단

플라스틱 통에 좌변기 뚜껑을 얹어 똥을 모은 후 톱밥으로 덮어 퇴비를 만들기도 했다. 겨울에는 단열이 엉망인 낡은 집에서 방안 온도 14도로 외투를 입고 지내기도 하고, 하수도도 막히는 등 사건 사고도 많았지만, 어쨌든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렇게 낡은 집이지만 살살 고쳐가면서 원룸운영으로 돈도 벌고, 적어도 15년, 20년은 이 집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의 한국사회, 하지만 먼 미래에 아이들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이 집과 이 동네를 떠올리며 고향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1년 살다가 돌아온 2017년 여름에, 집에 우편으로 도착해 있는 서류를 확인했다. 시에 예산이 없어서 영영 진행될 것 같지 않았던, 우리 집 필지를 침범해 들어오도록 계획된 소방도로 공사를 진행하겠다는 것이었다. 난감해졌다. 이 자리에 다시 원룸건물을 지어 올리던지, 이사를 하던지 결정해야 했다.

3층에서 내려다 본 텃밭과 인라인 타던 골목

지금은 도시계획지역 끝자락의 시골 같은 분위기가 좋았지만, 도로가 확장되면 곧 원룸과 상가주택들이 정신없이 즐비한 곳으로 바뀔게 눈에 보였다. 그 동안, 얼떨결에 해 왔던 원룸 운영도 충분히 힘들었고 지겨웠다. 아이들의 학교와 내 직장이 멀지 않은 곳, 이 동네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에 땅과 집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지금의 땅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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