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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vhon Mar 12. 2023

자유에 울타리는 필요한가

 블랙넛이 앨범을 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블랙넛이 소속된 그룹 ‘실키보이즈’가 2년 만에 앨범을 발매한 것이다. 앨범의 노래를 모두 들어본 뒤, 나는 자유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차오르던 그 생각을 결국 넘치게 만든 것은 얼마 전에 접한 뉴스였다. 한 정치인이 과거 집필했던 소설의 내용으로 인해 비판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실존 연예인들을 모델로 삼은 인물들을 작품에 등장시켰는데, 그들은 작품 속에서 성적 행위의 대상이나 주체가 되었다.     


 나의 중학생 시절 재생목록에서 힙합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좋아하는 래퍼의 신보 소식에 설레하고, 래퍼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들의 가치관을 동경하기도 하는 흔한 중학생이었다. 나는 다른 이들이 사회적 체면으로 인해 쉽게 뱉어내지 못하는 말을 자신의 소신 아래에서 뱉어내고 마는 래퍼들의 모습을 멋있다고 생각했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블랙넛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힙합이 하고픈 말을 뱉어내는 것이라면 그는 그 극단에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극단에 있다는 것은 곧 그 앞이 경계선이라는 말이기에, 아슬아슬한 그의 모습이 긍정적으로만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연대회에서 부당하게 탈락한 뒤 프로듀서의 면전에 디스 랩을 뱉어내던 그의 모습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에게는 무서울 것이 없어 보였다.     


 나는 이번 앨범을 듣는 동안 그의 여러 가사들에서 음악을 멈췄다. 나에게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가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건 ‘Mic 앞에 선 난 닉 부이치치 XX 못 빌어 못 꿇어’라는 가사였다.

 나는 이 가사가 폭력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한 성인 남자가 누드비치에서 나체로 걷는다면 그건 폭력이라 할 수 없지만 같은 행위가 초등학교 앞에서 이뤄진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나는 이 가사를 들을 힙합 팬들 중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펀치라인으로 재치를 드러내는 것과 헤이터들에 대한 저항을 드러내는 것이 상처받을 이들의 고통과 바꿀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인지에 대한 의문을 버릴 수 없었다.   

  

 실존 연예인들을 모델로 소설을 썼던 정치인은 비판에 대한 답변으로 표현의 자유를 말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을 모욕하고 상처 줄 자유는 대한민국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그의 세계 속에서 성적 대상이 되어 세워진 사람들은 지금도 같은 세상을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슬며시 바꾸는 것으로 자신의 위기를 넘어가려 하였다. 하지만 다른 이를 해한 뒤 자신의 주먹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것만으로는 폭력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나치가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은 그들이 악마이기 때문이 아니다. 일간베스트 회원들이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기름진 음식을 씹은 것은 그들이 악마라서가 아니다. 단지, “아니,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라는 질문이 부재했거나, 묵살당했을 뿐이다.

 이 질문은 모두를 불편하게 만든다. 굳이 그들을 멈춰 세우고 뒤를 돌아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가는 길이 바쁘거나 그 길이 원초적인 즐거움을 제공할 경우에 그 멈춤이 주는 불편함은 배가 된다. 하지만 이 질문이 멈추는 순간부터 평범의 탈을 쓴 악이 고개를 내밀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과거 블랙넛을 비롯한 래퍼들의 모습에서 내가 배웠듯이, 할 말은 뱉어내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블랙넛은 앨범 공개 당일에 인스타그램에 ‘티내지 말고 혼자 들어 고맙습니다’라는 멘트가 적힌 피드를 업로드했다. 그러나 음악은 혼자 듣는 것이 아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에어팟으로 귀를 막은 뒤에 그의 음악을 재생한다고 해도, 그 음악이 각종 음원 사이트에 등록되고 차트에 오르는 음악이라는 것을 아는 한, 나는 이 음악을 혼자 듣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이번 실키보이즈의 앨범을 숨어서도 듣지 않을 것이다.     


 자유에 울타리는 필요한 것일까. 이강백의 희곡 <파수꾼>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으로 사람들을 마을 안에 묶어두는 촌장이 등장한다. 그 촌장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은 자유에 대한 울타리를 치는 일이 과도한 검열이 되지 않을까라는 우려를 할 수 있고, 그 우려는 매우 타당하다.

 하지만 그 말이 곧 울타리가 필요 없다는 말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이리는 허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울타리의 가장 바깥쪽에서 피를 흘리는 양들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에겐 단지, ‘보호’가 ‘구속’이 되지 않는 범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울타리를 울타리 밖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 경계하는 것 또한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폭력이라는 이리를 발견할 때마다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부터 울타리는 세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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