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에반스 <왈츠 포 데비>
2018년 겨울,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다가 주인공이 듣는 재즈 음악들의 제목을 보고 재즈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노래를 들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던 나는 먼지가 쌓인 채 책장에 꽂혀있던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최소 20년은 되어 보이던 그 책은(아마 아버지가 읽으셨던 책이지 않을까 싶다)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재즈 아티스트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책이었다. 나는 그나마 익숙한 악기인 피아노를 다루는 사람을 찾았고 그 책은 빌 에반스를 나에게 권해주었다. 나는 곧바로 빌 에반스 트리오의 앨범 ‘왈츠 포 데비(Waltz for Debby)’를 찾아서 재생했는데, 첫 곡을 들은 뒤에 나는 곧바로 빌 에반스의 이름을 외웠다.
내가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을 넘어 그의 팬이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가 더 지나서였다. 우연히 보게 된 그의 인터뷰 영상에서 그의 친형 해리 에반스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결과에 대해 집중하느라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물었을 때, 빌 에반스가 했던 대답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는 ‘진실되고, 현실적이고, 정확하게 노력해야 한다(It must be entirely true, and entirely real, and entirely accurate)’고 말한다. 이 말은 일면 당연해 보일 수는 있지만, 현실에 당연하게 실현되는 말은 아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곧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며, 현실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안다는 것이고, 정확하다는 것은 그 노력의 표적을 응시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그의 말처럼 자신의 문제를 여러 단계로 나눈 뒤 정확한 노력을 해나가야, 그 작은 단계들이 모여 변화를 만들고 그 변화는 아득해 보이던 목적지 앞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 것이다.
삶을 바꾸는 것은 뼈가 아니라 근육이다. 사람은 각자의 것들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삶은 결국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가능성은 자신의 진실되고, 현실적이고, 정확한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살기 위해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만, 입으로 들어오는 것을 근육으로 바꿔낼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일의 나 자신에 의해 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의 음악과 가치관에서 이 진실을 건져 내었다.
내가 빌 에반스의 태도를 사랑하는 만큼, 그의 말년을 들여다보는 일은 힘든 일이다.
앞서 그에게 질문을 던졌던 형 해리 에반스는 정신분열증을 앓다가 1979년에 자살했다. 든든한 형이자 동료 피아니스트를 잃은 빌 에반스는 마약 중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형의 뒤를 따라갔다. 형의 죽음으로부터 1년이 지난 후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급성 간염 약을 끊기도 하였는데, 그의 어느 친구는 그의 죽음에 ‘역사상 가장 긴 자살’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죽음마저도 진실되고, 현실적이고, 정확하게 도달해야 하는 것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