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세계문화유산
교토부 남동쪽에 위치한 우지(宇治, うじ)시. 한국으로 치자면 보성에 해당하는 녹차의 명소다. 신뢰가 가지 않을 정도로 녹차와 관련한 음식의 모든 원산지가 우지로 표기되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차가 나길래 이렇게 많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많다. 드넓은 녹차밭을 상상하며 출발했는데 이날 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한 손엔 우산, 한 손엔 카메라를 들고 고생했던 날이다.
우지역은 JR과 케이한선 두 곳이 있다. 나는 패스카드 때문에 선택의 여지없이 케이한선을 탔으나 유홍준 교수가 언급만 하고 가지 않은 우지카미 신사(宇治上神社, うじかみじんじゃ)가 평등원(뵤-도-인, 平等院, びょうどういん)에서 바로 강 건너 있기 때문에, 신사를 먼저 들렀다가 가는 것이면 케이한선 쪽을 추천한다. 오사카에서 간다면 요도야바시(淀屋橋, よどやばし)역에서 케이한본선을 타고 쭉 올라가다가 추우쇼시마(中書島, ちゅうしょしま)역에서 내려 케이한 우지선으로 환승해서 종점인 우지에 내리면 된다.
케이한선은 물론 일본 전철은 역이 많아서 시간대별로 급행, 완행이 굉장히 다양하다. 먼저 온 것을 타도 완행이면 시간에 있어 상당히 지연될 수 있으니 타고 내리는 역도 중요하지만 무엇이 적은 역에 정차하는지도 확인해야한다.
전철 시설면에서는 우리가 더 신식이고 교통비도 저렴하니 좋은데,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그냥 단조롭게 역 이름만 써놓은 것이 아닌 역을 중심으로 주변의 관광지 위치까지 자세히 표기해놓은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유명 명소만 별도로 표시한 노선도를 볼 수 있지만 디테일 면에서 이렇게 자세한 것은 본 적이 없다. 우측으로 가는 세 노선 중의 가운데 끝에 77번 '우지'역을 찾을 수 있다.
우지역을 나오면 가장 먼저 맞아주는 것은 큰 강이다. 내심 푸른색 녹차로 뒤덮인 산을 기대했는데 멀리 공장으로 보이는 건물에 큰 굴뚝이 보여 조금 아쉬웠지만 강물도 나쁘지는 않았다.
비가 와서 물살이 빨랐음에도 탁하지 않은 우지천.비와호에서 내려오는 거리가 꽤 되는데도 1급 하천이라니 녹조에 시달리는 낙동강을 보면 부러울 따름. 그래서인지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은 두루미와 가마우지들을 볼 수 있었다. 다리 위에서 새들이 물고기 잡고 자멱질하는 모습에 빠져 한참을 서 있었다.
일본, 그것도 간사이, 아니 교토 안에서만 해도 세계문화유산이 너무 많아서 별 감흥이 없을 정도. 그러나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세계문화유산을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것도 운이지. 왜 유 교수는 우지카미신사는 안 가셨을까. 가셨는데 책에 싣지만 않으신건가. 한 줄이라도 언급을 하셨는데 책에는 내용이 없어 부족하지만 살을 덧붙인다.
케이한역에서 나와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강변을 따라 왼편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지카미 신사를 맞을 수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책에서는 우지'가미'라고 되어있다. 신을 일본어로 카미(神, かみ)라고 하는데, 약하게 '가미'라고 발음할 때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카미는 신이 아니라 '상上'자의 음이라 우지카미가 맞다. 표기법 때문에 답답한데, 보기에 개의치 말고 일본어 표기법 그대로 쓰는 것이 맞다고 본다.
맑은 날 다니기도 좋고 사진도 아름답지만, 비가 와서 또 그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여행은 부정도 긍정적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골목길은 갈림길도 많고 다른 신사들도 가까이 있어서 혼란을 줄 수 있으니 안전하게 가려면 강변을 따라 가기를 권한다. 시야가 탁 트이고 잘 정비되어 있어 역시 그만의 매력이 있다.
이왕이면 강변 보다는 같은 방향이므로 사람들의 사는 모습들을 보면서 가고 싶어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일찍 가서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 이제 출근 준비를 하는 사람, 학교에 가는 이들. 소소한 삶의 일상을 만날 수 있다.
골목에서는 종종 작은 신사와 납골당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 중에 '자애'라는 이름으로 동물들의 영을 모시는 비석이 기억에 남는다. 헬로 키티와 목조반가사유상이 같이 있는. 위에는 고양이 사료 캔들이 있어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이 느껴졌다. 제법 큰 규모의 신사가 또 하나 있는데 이럴 땐 부득이 한자로 구분하는 수 밖에 없다.
신사를 찾을 때는 가장 먼저 토리이를 찾는 것이 빠르다. 가장 높고 대부분 붉은 색이라 멀리서도 눈에 띈다. 토리이에서 안으로 들어가야 제대로 들어간 것이고, 항상 토리이 다음에 신사가 있다.
아주 멋진 글자체로 '세계문화유산 우지카미신사'가 음각되있어 기대를 하고 들어갔는데 아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놀이공원에서도 쓰기 민망한 토끼 모양의 주차 금지판이 분위기를 다 깨뜨리고 말았다. 관서전력이라는 주식회사가 둔 모양인데 단순히 주차를 막기 위한 수단이라 하더라도 명색이 세계문화유산인데 이런 유치한 것으로 조화를 깨뜨리니 아이러니 했다.
그리고 신사에 들어가기 전에 나를 노려보는 매서운 눈 때문에 아침부터 깜짝 놀랐다. 경찰서와 방범협회가 "보고있다! 문화재를 훼손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굳이 일본어 몰라도 해석가능한 경고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는 좋지만 이거 이미 잠정 범죄자가 된 것 같은 불쾌함. 이런 자잘한 것들에서 평소에 찾기 힘든 일본의 실수. 분명 유 교수가 보셨어도 똑같은 한마디를 하셨을 것이다.
우지카미신사는 15대 오우진 천황(応神天皇), 그 아들 16대 닌토쿠 천황(仁徳天皇), 그리고 닌토쿠 천황의 이복 동생을 모신 신사다. 닌토쿠 천황의 이복동생은 본래 오우진 천황의 황자였으나 형에게 천황을 넘겨주기 위해 자살했다는 미담으로 알려져있다. 일본서기에 우지노와키이라츠코(菟道稚郎子, うじのわきいらつこ)라고 기록되있다.
창건을 언제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죽은 오우진 천황의 황자의 별궁(桐原日桁宮)이었다는 설이 있고, 60대 다이고 천황(醍醐天皇)이 신탁을 받고 901년에 설립했다는 설도 있다. 최초 기록은 927년 <연희식(延喜式)>이라는 문헌에 '우지에 두 자리의 신사'가 있다고 되있는데 이것이 우지카미신사의 두 건물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우지카미신사에 바로 아래 위치한 '우지신사宇治神社'를 말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앞 뒤로 주요 두 건물이 있는데 앞의 것이 <배전(拝殿)>으로 카마쿠라 시대에 지어진 것. 뒤에 있는 본전이 가장 오래되었다는 <본전(本殿)>이다. 2003년 12월 부터 2004년 2월까지 나라 문화재 연구소에서 연대측정조사를 했는데 1060년 무렵에 본전이 지어진 것으로 밝혀져,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신사 건물로 인정받았다. 그 때문에 1052년(유홍준 교수 책에는 1053년이라고 되어있으나 일본의 여러 사이트는 1052년이라고 되어있다. 1년 차이가 나에게는 그리 의미가 없지만 정확성을 위해 남긴다)에 지어진 평등원과 관련성을 지적한다.
배전은 1215년경 벌채된 노송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본전보다 약 150년 뒤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한다.
건물은 단단하고 위엄이 있으나 신사 경내 규모가 작아서 뭔가 조화롭지도 않고 어색하다. 조금만 트였으면 위엄 있어보였을텐데.
너무 일찍 가서 일하는 직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참배객이 없어서인지 신사라기 보다는 국내 서원 같은 느낌. 직원이 처음 들어갈 때 왜 이 시간에 왔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는데 내가 카메라 셔터를 막 누르자 외국인인 것을 알았는지 갈 때까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배전은 맞배지붕이면서 좌우 양쪽에 차양이 있는 형태로, 노송나무 껍질이 올려져있다. 건축은 물론이고 모두 검색한 것을 부족한 실력으로 옮긴 것이다. 따라서 정확도는 보장할 수 없다. 앞에는 원뿔 모양으로 모래가 쌓여있는데 '키요메스나(清め砂, きよめすな)'라고 하며 이름대로 '정화하는 모래'다. 이 모래는 매년 9월 1일에 받아 1년동안 사용한다고 한다. 물론 만지면 안된다. 배전 뒷모습은 지붕만 빼고 보면 문창살 때문인지 한옥을 보는 느낌이 난다.
일본의 신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함에도 아주 깨끗하게 새것처럼 잘 보전돼있었다. 옆에서 보면 본전 지붕의 곡선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각으로 뻗쳐있는데, 아주 일품이다. 개방을 하지 않아서 내부를 볼 수 없었지만 본전은 좌측에 황자, 가운데 오우진, 우측에 닌토쿠 천황을 모시도록 배치해두었다 한다. 본전과 배전 모두 일본 국보로 지정되있다. 상당히 중요한 곳인데, 노려보는 눈의 경고판만으로 지켜낼 수 있을까.
이 밖에도 작은 제단 격인 섭말사(摂末社)가 분포해 있는데, 가장 큰 것은 카마쿠라 시대 만들어진 춘일사(春日神社, かすがじんじゃ)로 이것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후지와라노 일족의 수호신을 모신 것으로 추측되는데, 확실히 평등원과 연관이 있는 듯. 평등원은 불교 사찰로, 이곳 우지카미 신사는 신사로 신도와 불교 양쪽에서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맞겠지?
그리고 우지칠명수(宇治七名水)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샘터가 배전 바로 우측에 있다. 이름은 키리하라미즈(桐原水, きりはらみず)로 참배 전에 손을 씻는 용도로 우측에 배치되어있는데 왠지 으스스하면서 신비감이 느껴진다. 신사에 있는 물은 정화수로 입을 헹굴 수는 있어도 마시는 용도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기 물은 받아가는 사람이 있는 듯. 한 시간 정도 끓이면 괜찮다고 하는데 물 상태를 봐서는 그닥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일본인도 이곳이 수수하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이 아니었으면 관심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나 역시. 그냥 평등원 앞에 있어서 들른 것이지 평등원이 아닌 이곳을 보기 위해서만 우지를 찾는다면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곳.
단지 가장 오래 되었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