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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담 Oct 04. 2016

<교토편> 10. 낙서의 용안사

범인은 느낄 수 없는 일본의 아름다움

 내가 태어난 곳은 대구의 한 병원이지만, 본적은 안동시 풍산읍으로 하회마을 바로 뒤였다. 어릴 때 분명 몇 번 갔을 것이나 기억에 없고 한창 머리가 굵어져서 일본에 사는 사촌동생을 데리고 한 번 갔다온 적이 있다. 전통가옥과 탈춤공연장을 제외하고는 휑한 느낌이 너무 강해 안타까움이 더 컸다. 1999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하여 언론이 떠들썩했을 때가 생생하다. 그 때 탤런트 류시원 씨가 가이드한 것도 기억나고, 내가 태어난 이후로 안동이 가장 부각된 적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분명 외국인들이 많이 찾겠지만, 인천 혹은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방문할 외국인에게 나는 시간을 들여 하회마을을 꼭 봐야한다고 추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회탈이라는 강력한 콘텐츠가 있으면서도 뭔가 아쉬운. 우리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 기대심만 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왕은 왜 수많은 곳들 중 왜 하회마을을 찾았을까. '아무래도'라는 말이 걸리는 것이 유홍준 교수 생각도 나처럼 좀 다른 것 같지만. 

 정작 한국인이면서도 가장 한국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는 30년을 살았어도 어렵다.  형동생으로 지내는 방송인 로버트 할리 씨는 한국의 '정'에 끌렸다고 하셨는데, 나는 일본에서도, 독일인에게서도 똑같은 '정'을 느꼈어서 그것이 고유의 우리만의 성질은 아니다. 경주는 신라, 부여는 백제, 서울은 조선 왕실, 안동은 유교,사림,양반을 떠올릴 수 있는데. 아무래도 하회탈이라는 캐릭터와 안동의 헛제사밥, 전통한옥 등 고전적 의식주와 볼거리를 모두 갖추고 현재까지 유지해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분명 경주도 부여도 서울도 한가지씩 부족하다. 납득은 하면서도, 그럼에도 약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일본이 너무 관광기반을 잘 갖추고 있는 사실에 주눅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엘리자베스가 일본에 간 지 20년이 지난 후에야 한국에 왔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한다.

 그러나, 용안사는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하고 많은 곳 중에 용안사가 일본을 대표하는 유적이라고 생각했을까. 

금각사의 남서쪽에 위치한 용안사. 같이 답사하는 것을 추천한다. (구글 지도) 

 용안사(료-안지,龍安寺,りょうあんじ)는 금각사 남서쪽에 있으나 걸어가기엔 멀다. 교토역에서는 시영버스 50번을 타고 리츠메이칸다이가쿠마에(立命館大学前,りつめいかんだいがくまえ) 정류장에서 내리면 10분 정도 거리에 용안사가 있다. 또는 다른 곳에서 버스를 탄다면 55번이 가고, 59번은 료-안지마에(龍安寺前,りょうあんじめ) 정류장에서 선다. 케이후쿠선(京福泉) 전차를 타면 용안사역이 있는데 걸어서 10분 거리다. 가급적 모두 즐기는 걸 좋아해서 항상 한 번은 버스, 한 번은 전철식으로 가는 방식을 달리하는데 더 매력적이다. 간사이 스루패스만 있으면 모두 무료기 때문에 제약이 없다.

 용안사를 '낙서(洛西)의 용안사'라고 하셨는데, 낙서 지역은 교토의 우경구(右京区)、서경구(西京区)、장강경시(長岡京市) 지역을 일컫는다. 일본어 발음으로는 라쿠사이(洛西, らくさい)다. 금각사, 용안사, 천룡사 인화사까지 이어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절들과 아라시야마 모두 낙서 지역이다. 금각사에서 인화사까지 2.5km 구간이 이어진 길을 '키누카케누미치(きぬかけの路)'라고 하는데 비단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비단은 없고 아스팔트만 있다. 금각사에서 용안사까지는 걸어서 약 20분, 다시 용안사에서 인화사까지는 걸어서 약 10분 정도가 걸린다. 어디든 절 경내를 다 걷다보면 다리가 아프기 마련이고 그닥 매력적인 길은 아니다.

입구 앞 신호등 옆에는 '명승 용안사정원' 이라고 적혀있다. 

 석정(石庭)은 어려운 뜻 없이 '돌로 된 정원'으로 절 자체보다 정원이 더 유명해진 격이다. 이상한 비유지만 배보다 배꼽이 더 커야 오히려 인지도가 더 높아진다. 한가지 핵심 자원을 홍보해서 그곳을 방문하게 하는 관광의 핵심. 파리에 에펠탑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파리 하면 에펠탑이 먼저 떠오르듯이. 그리고 그 에펠탑을 보기 위해 파리를 방문해서 잠을 자고 음식을 먹듯이. 우리도 확실한 킬러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족히 수백개는 넘을 것 같은 교토의 사찰 중 용안사는 행운을 잡았다. 

 우리나라도 단순히 경복궁 전체가 아니라 근정전이나 경회루를 일단 메인으로 한다거나 불국사 전체보다 다보탑을 먼저 내세우는 방식이 더 효과적 일수도 있다. 그래서 화폐가 바뀌었을 때 인물은 그대로 두고 뒷면을 건축물이 아닌 그림으로 바꾼 것이 나는 너무나 안타깝다. 

 반면 일본은 10엔에 우지 평등원 봉황당, 1000엔에서는 후지산을, 2000엔에서는 오키나와의 슈레이몬(守礼門), 10000엔에서는 역시 우지 평등원 봉황당의 (그리고 금각사와 은각사에서도 볼 수 있는) 봉황상을 만날 수 있다. 

 과거 천원의 도산서원, 오천원의 오죽헌, 만원의 경회루 모두 사라졌다. 일단 외국인이 그 나라 들어가기 전부터 접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는데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지금은 잘 쓰지도 않는 10원짜리 동전을 꺼내야 다보탑 밖에 볼 수 없게 되었다. 100원 짜리는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 있어도 얼굴이 다르니 외국인들이 알아볼리가 없다. 일본에서 손님을 모시고 경복궁을 안내하다가, 마침 지갑에 만원 구권이 있어서 경회루 앞에서 뒷면을 보여줬다. 일본인 특유의 감탄사와 함께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이제 이 모습을 볼 수가 없으니 아쉽다. 신권을 발행할 때 이런 관점에서도 한 번 접근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얼마나 석정이 보고 싶어 달려가셨으면 순서를 뒤바꾸셨을까. 용안사로 들어가면 가장 반겨주는 것은 경용지(鏡容池, きょうようち)로 큰 연못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용안사 편은 거꾸로 읽는 것이 실제 동선과 맞다. 입장료는 500엔. 입구에 바로 매표소가 있다. 석정이 그려진 티켓을 준다. 금각사 티켓이 소장 가치가 있게 잘 만들었는데 다른 곳에도 조금 색다른 방식을 택했으면 어땠을까 한다.

 입구에서 바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되있다. 국내에선 나무판으로 된 건물을 맨발로 걸어다닐 경험이 없는데 삐그덕 거리는 나뭇소리가 정겹다. 

 책에서 볼 수 있는 그림들이 그대로 있다. 바보같이 '운관' 뒷면에 써진 '통기' 글자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천룡사에서는 다른 사람이 달마도 뒤를 안보고 그냥 지나쳐 혼자 좋아했는데, 여기서는 내가 그런 실수를 했다. 입구로 다시 돌아서 나오게 되있기 때문에, 유 교수처럼 바로 내부를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천천히 봐도 좋다. 아이들 장난감처럼, 미니(ミニ)라고 써진 용안사의 석정을 먼저 만날 수 있다. 이건 없는 게 나을 듯. 바로 실제를 만났을 때의 기대감이 반감되었다. 잘 안보이는 곳에 두거나, 좀 치사하지만 더 작게 만들어서 기념품으로 파는 것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서양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내가 갔을 때 한국인은 나뿐인 듯했다. 용안사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던 것인가? 엘리자베스의 영향인가. 아니면 서양인의 사고에서 정말 이것이 일본적인 것인가. 가장 우리와 가까운 나라이지만 오히려 서양인들이 일본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메이지 시대 이토 히로부미를 필두로 하는 유학파들이 제국주의를 먼저 받아들였고, 단순히 열강의 논리가 아닌 정서적으로 유럽과 맞는 것이 많아서는 아닌지. 그렇다면 왜 일본만 그러한지. 중국을 건너 우리나라를 통해 문물이 오고 갔는데 왜 사고체계가 다른 것인가. 내가 돌아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앉아 있는 이들이 많았다. 아마 이들은 오롯이 하루를 이곳에서 보냈을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용안사의 석정

 석정을 바로 마주하고 다른 유적지를 갔을 때처럼 입에서 먼저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아!' 가 아니라 '어?'였다. '이게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찬탄한 용안사인데 아무 감흥이 들지 않았다. 청수사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예술에 너무나 무지하여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자책했지만,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모두가 이쁘다고 한 것이 내 눈에 안 예쁠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진심으로 무언가를 느끼는가. 아니면 남이 한 말이나 글을 보고 그 느낌 자체도 만들어낸 인위적인 것인가. 

 아무리 쥐어짜내도 한참을 앉아있어도, 내 마음은 삐뚤어져 '그저 돈 많고 하릴없는 이가 돌을 가지런히 정리해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허무함. 그 불확정적 비움에서 '비움'만 남아 휑한 허무함. 

 "깔끔하다"는 느낌이 가장 긍정적인 표현이 될까. 무튼 만약 이 석정을 내 집 앞마당에 놓아준다 해도 나는 거절했을 것이다. 

 옆으로 25미터, 위아래로 10미터. 흰 쇄석을 깔고 그 위에 동쪽에서부터 5개, 2개, 3개, 2개, 3개 돌이 있다. 아무 증거도 이론도 없지만 난 이 돌에 별 의미는 없다고 확신이 들었다.     

 설명이 엉망이라 무슨 돌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돌은 크게 3 종류로 구분 된단다. 중 가장 큰 4개는 용안사 뒷산에서부터 니시야마(西山)에 흔히 볼 수 있는 바위 재질로, '차트'라고 부른다. 담쪽의 길쭉한 2개의 돌은 교토부 탄바(丹波)의 아타리 산의 바위. 나머지 9개는 산바천(三波川)의 녹색편암이라 한다.

 석정은 담 쪽의 가늘고 긴 돌에 소타로, ?지로(小太郎二郎)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그와 관련된 사람이라고만 추측하고 정확히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단다.

 돌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겠는가. 자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마음이 문제지.

 그래도 조금 더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는 것은 뼈저리게 느끼며.

 석정 말고도 용안사 방장에는 볼 거리가 많다. 방장(方丈)은 불교에서 그 사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보통 높은 스님이 거처하는 곳을 뜻한다. 문마다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벚꽃인지 매화인지 알 수 없는 그림이 한가득이다. 운룡도가 멋져서 꼭 육안으로 보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문을 열어놓아 앞발과 꼬랑지 밖에 보지 못했다. 유 교수는 또 문 열린 방장은 못 보셨겠지 하고 애써 자위한다. 방장 현판은 천룡사보다 확실히 유약한 느낌이 들지만, 석정의 분위기와는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 날 개인적 백미는 석정보다 바로 금강산 그림이었다. 다행히 금강산 그림이 걸린 방은 문이 닫혀있어서 모두 볼 수 있었다. 처음에 책 내용을 또렷이 기억한 것이 아니어서 왠지 정겹고 낯익은 모습의 산이 마음에 와닿았다. 건물 한 채가 그려져있는데 아무리 봐도 일본식 건물이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 금강산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통일부 주관으로 학교에서 3명을 선발하여 금강산을 보내줬는데, 학교측 배려로 내가 가는 천운을 얻었다. 지금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래서 더 가치있는 금강산 탐방. 그 기억 속에 금강산 봉우리가 그림으로 있으니 알아본 것이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책을 뒤져 확인하니 역시나 금강산이 맞았다. 또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인지. 하루 빨리 다시 가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뿐. 이산가족이 아니라 이산금강이다. 

분명 일본이 아닌 한국의 집이다.

나 역시 용안사 유감이 있다. 유료 입장은 꼭 밖에서 담장을 둘러 내부를 못보게 되있는데 이것이 안에서 볼 때는 심히 미관을 해친다. 물론 질서와 만약의 사고를 대비해서 필요는 하지만 꼭 대나무 장벽으로 꽁꽁 둘러쳐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마땅한 대안은 없군... 

 그리고 오래된 고찰에 빗물받이를 쇠로 만들어놓았는데 너무나 보기 흉하다. 분명 처음에는 저런 것이 없었을 텐데, 비가 오면 자연스럽게 떨어지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

오유지족의 우물

 방장 뒤를 돌면 용안사의 마스코트, 오유지족이라는 글씨가 양각된 물받이가 있다. 지족의 준거(치소쿠노츠쿠바이, 知足の蹲踞, ちそくのつくばい)라 하여 각종 기념품도 판매한다.

 설명이 자세히 되있다. 계단으로 아래 내려갈 수 있는데 방장에서 내려가지 말라는 안내판 때문인지 지나가면서 아무도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많았다. 석정만 보러 온 듯. 

 다른 사진으로 볼 때는 오유지족(吾唯知足) 글자가 선명했는데, 이끼도 껴있고 계속 물이 흘러 알아보기 힘들다. 마실 수는 없는 물이다. 한글로는 이런 식으로 만들 수가 없다. 방향을 뒤집어 받침을 ㅁ이나 ㅇ을 공통으로 하는 글자를 만들 수는 있으나, 한자의 매력을 잘 살린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아무도 궁금한 사람이 없겠지만, "나는 오직 족함을 알 뿐이다"를 일본어로는 "오레유이다타루코토오시루(吾れ唯だ足ることを知る)"라고 한다.

 밖으로 다시 나가면 방장에서 석정 쪽으로 문이 닫혀 안보이던 외관이 드러난다. 바깥에서도 방장 현판은 보인다. 지붕은 절보다 신사 같은 느낌을 준다. 숲을 아주 잘 조성해두었는데, 문제는 용안사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너무 길쭉길쭉하고, 마치 열대지방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가장 이해가 안가면서 생뚱맞은 버마탑을 보면 유 교수님과 마찬가지로 황당하기 짝이 없다. 여전히 태평양 전쟁에 있어 피해자격인 자세를 세계문화유산에서 드러낼 뿐만 아니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관의 미얀마 디자인이라니. 석불좌상을 만나고 오지 못해 아쉬울 따름. 

 그래도 공기는 좋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다시 입구에서 본 경용지를 다른 방향에서 만나볼 수 있다.

 끝까지 왜 다른 곳을 두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곳을 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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